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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시 Mar 03. 2016

생의 한 가운데

25- 살로몬


빈 창이다. 전면에 사각의 창만 가득하다. 창밖은 파란 하늘이고 아래로 건너편 집의 붉은 지붕 선이 일렬로 낮게 깔려 있을 뿐. 벽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고 마루바닥도 비어 있는 채 창을 향해 뻗어 있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창으로 이끌고 있다. 그런데 창틀이 기울어져 있다. 마음이 이지러져 있는 걸까 아니면 어디로 쏠리고 있는 걸까. 창을 고정시키는 철사고리도 제자리에 있지 않고 양쪽이 다 풀려 있다.
 
  샤롯 살로몬은 1917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독일 유태인 화가이다. 창은 그녀에게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비운의 가족사에는 8건의 자살 사건이 있었고, 한 건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여자들의 자살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따온 이모 샤롯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 자살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7살 때 창문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그녀가 성년이 된 다음이긴 했지만 그녀의 할머니 또한 자살하였다.
  그녀는 나중에야 이러한 가족의 비극적 내력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한 심리적 충격을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저항하고 극복하려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생애를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나치의 광란을 피해 피신한 프랑스 남부 니스 인근의 생장갑페하Saint Jean Cap Ferrat 의 한 호텔 방에서 2년 가까이 열정적으로 작업에 몰두하였다.                                                          

 

  창 앞에서 망상에 사로잡히거나 온갖 번민에 끌려다니는 자신의 모습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였다. 창은 집안의 비극에 대한 기억을 되풀이해 환기시키는 단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딛고 서서 현실을 조망해야 할 틀이기도 하다. 어릴 적 자살한 어머니가 승천하여 하늘나라에서 천사가 되고 자신에게 편지를 들고 내려와 침대 맡에서 천국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들려주는 달콤한 환상도 화폭에 담았다. 이제 창은 집안의 정신적 장애 내력이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대한 심리적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구원에 이르는 통로이자 매개가 된다. 삶의 계기가 되는 에피소드와 이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인생 전체가 이렇게 하나의 시리즈 그림이 되었다.
  그녀의 화풍도 특색이 있지만 더 특이한 것은 그림책이나 시화처럼 그림 속에 글을 적어넣음으로써 그림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모티프로 모두 1,300여점의 구아슈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이 중에서 769점을 추려서 노래가 있는 연극 형태로 일련의 작품들을 모아 "삶과 극장"이라고 명명하였다. 자신의 인생을 극장에서 공연되는 한편의 연극으로 보고 마치 중요한 내용 전개에 대한 콘티를 짜놓은 것 같다.  이 저작에는 이모의 자살에서부터 시작해서 부모의 만남, 자신의 출생과 같은 개인사적 사건들을 비롯해 나치의 등장과 폭압과 같은 사회적, 역사적 상황도 묘사되고 있다.
  그녀는 나중에 이를 인근 지역 의사에게 맡기면서 이 그림들은 자신의 삶 자체이니 부디 안전하게 잘 보관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1년 뒤인 1943년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결국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그녀 나이 26세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나중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림들은 무사히 그녀의 부모에게 전달되었고, 이후 1961년 전시되었으며 책으로도 출간되어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그림은 1971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유태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그녀의 작품은 독일 나치 시대의 개인적인 기록물의 하나로서 뛰어난 홀로코스트 예술의 한 지평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안네 프랭크와 마찬가지로 샤롯 살로몬은 시각예술에서의 안네 프랭크로 평가받는다
 
  창 앞에 설 때 우리는 어디만큼 와 있게 되는 것인가. 적어도 샤롯 살로몬의 경우는 창 앞에 서 있었을 때 그녀 생의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었다.  나치의 조여오는 압박을 본능적으로 감지했을까. 그녀는 창과 함께 인물이 그려진 여러 그림들 이외에 이렇게 자신의 모습이 지워진 빈 창의 그림도 아울러 남겼다. 하지만 이때쯤 그녀는 과거의 창틀에 갖혀 있지 않았던 듯하다. 창틀의 상단 부분을 그리지 않고 열어 놓음으로써 시각적으로 트인 개방감을 확보하고 있으며, 심리적으로도 불투명한 앞날을 적극적으로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비록 한창 꽃다운 나이에 잔혹한 역사의 희생물이 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죽지 않고 굳건히 다시 살아났다. 그녀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꾸준히 전시되고 있으며,  그녀의 생애 또한 연극이나 오페라, 발레 등 여러 장르로 되살아 나고 있다*.
 
*주) 연극은 2003년에는 영국 켄트 지역의 톤브리지에서 "천사들의 친구: 샤롯데 살로몬의 이야기"란 제목으로 올려졌으며, 오페라는 2014년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프랑스 작곡가 마크 앙드레 달바비에 의해  "삶 또는 연극"이란 제목으로 만들어져 공연되었다.  2015년에는 독일 겔젠키르헨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발레 "삶 또는 연극: 죽음과 화가"가 공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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