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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시 Mar 03. 2016

남겨진다는 것

26- 뮌터

붉은 커튼이 창의 양쪽 끝에 드리워져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심도 조금씩 빛이 바래간다. 전면에 눈내린 겨울 창을 마주하고 뒷모습의 여인이 식탁에 앉아 있다. 창 밖 아침을 먹는 겨울 텃새들의 지저귐이 따스했던 옛기억들을 소란스럽게 불러 들이고 있다. 하지만 여인의 외양은 군더더기없이 간결하다. 창을 마주하고 마음을 다잡고 있는 걸까. 음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웃옷 색깔이 그녀 속마음처럼 어둡다. 홀로 남겨진다는 것은 외롭고도 쓸쓸한 일이다. 문득 뒤돌아 보면 모르고 앉은 철제의자처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선뜩함이 낯설기만 할 뿐이다.


  가브리엘 뮌터는 20세기 초 뮌헨 전위 그룹인 독일 표현주의 화가이다. 1877년 베를린 태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유복한 집안에서 부모의 적극적인 성원에 힘입어 개인교습까지 받아가며 역량을 키워 나갔다. 부모의 유산으로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상태에서 예술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본격적인 공부는 새로운 진보적 성향의 뮌헨 팔랑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회화 이외에 목판화와 조각도 배웠으며, 무엇보다도 그곳의 리더인 바실리 칸딘스키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때 뮌터는 25살이었고 칸딘스키는 36살이었다. 칸딘스키는 이미 6년 연상의 사촌 안나 체먀키나 Anna Chemyakina와 결혼한 상태였다. 1902년 여름 칸딘스키는 뮌헨 남부의 알프스 지역에서 열리는 여름회화캠프에 그녀를 초대하였고 그녀가 응함으로써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 관계는 점차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칸딘스키는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그녀의 평온함이나 자신감에 매혹되었다.

  칸딘스키가 기혼자 신분이었지만 1903년 이 둘은 약혼을 하였다. 독일로 되돌아올 때는 따로따로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같이 여행도 다녔다. 1906년에는 파리에 셋집을 얻어 같이 지내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칸딘스키가 파리가 자신과 안맞다며 떠나려 할 때에 뮌터는 이에 반대하고 자신의 독창적 화풍을 찾아 그곳 미술학교에 등록하고 혼자 남았다. 이후로도 그녀는 5년을 더 칸딘스키를 바라보고 살았지만 불행히도 칸딘스키는 여전히 다른 여자와 결혼 상태에 있었다. 1908년 여름 두 사람은 바바리아의 무르나우에서 같이 지냈다. 그 해 여름을 전기로 칸딘스키는 추상화의 세계에 진입하였다. 다음 해에 이들은 무르나우에 집을 한 채 사서 드러내 놓고 공개적으로 같이 살기 시작하였다. 이 기간은 표현주의 전위예술 집단인 청기사파를 결성하면서 그들 두 사람 모두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인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의 열기는 서서히 식어가기 시작하였다.


  1911년 칸딘스키는 공식적으로 안나와 이혼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두 사람은 스위스로 넘어갔다가 적으로 취급받은 칸딘스키는 1914년 뮌터를 리히에 남겨놓고 자신은 모스크바로 떠났다. 1915년에 이 둘은 스톡홀름에서 다시 만나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서로 떨어져 지냈다. 칸딘스키는 1917년 겨울에 드디어 다시 결혼하였다. 하지만 상대는 오래동안 그를 기다렸던 뮌터가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6개월 전에 새로 만난 니나 안드리프스키 Nina Andreevsky 라는 여인이었다. 칸딘스키는 이 결혼을 뮌터에게 알리지 않았다. 뮌터가 서신을 보내는 등 연락를 취해 보았지만 칸딘스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4년 뒤 1921년에 이르러서야 전화 한 통을 걸어왔다.  그것도 변호사를 통해서. 요지는 자신의 짐과 그림들을 되돌려 달라는 것이었다. 뮌터는 칸딘스키의 부탁을 대부분 들어주었지만 그림 일부는 배신의 대가로 돌려주지 않았다. 칸딘스키와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뮌터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가 근 10여년이 지난 다음에야 다시 붓을 들 수 있었다.

  뮌터의 예술은 칸딘스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나중에 그녀는 칸딘스키가 자신의 재능을 축복하고 이해했으며 보호하고 더 진전시켰다고 말했다. 뮌터가 <새들의 아침식사>를 그렸을 때는 50대 후반이다. 아마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더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39세에 그린 또다른 그림 <숙고>는  앞의 그림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표현주의적인 스타일은 두 그림이 비슷하다. 두텁고 빠른 붓질, 무겁고 어두운 윤곽선, 간결한 형태와 압축된 공간 등은 모두 공통되다. 하지만 전면에 앞모습으로 실내에 앉아 있는 지적이고 당찬 모습의 인물 얼굴을 보라. 사랑을 받으며 같이 할 때의 모습과 버림을 받고 혼자 남겨질 때의 모습은 이렇게도 차이가 난다. 한쪽은 아예 얼굴조차 드러나지 않는 데 반해, 다른 한쪽은 얼굴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창을 등지고 있는 어두운 배경 속에서도 환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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