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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시 Apr 07. 2016

탈주

53-#01-툴루즈 로트렉

툴루즈 로트렉, 세탁부, 1889, 92×74㎝, 개인소장

  일상은 항상 지리멸렬하다. 그것이 다행히 평범하다할지라도 그러할진대, 신에게 버림받거나 헤어나오기 힘든 수렁에 빠져있는 불운이라면 말해 무엇하랴.


  툴루즈 로트렉은 어렸을 때는 한때 “작은 보석”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울 정도로 프랑스 귀족 가문의 축복받은 아이로 태어나 가족의 사랑과 기대를 온몸에 받았다. 하지만 신의 질시를 받았는지 유전적인 질환에 더해 말에서 떨어지는 잇다른 사고로 끝내는 성장이 멈추는 난쟁이의 삶을 살아야했다. 명문가문은 굴레가 되었다. 귀족의 작위 승계도 박탈당하였다. 화가가 된 이후에도 툴루즈 로트렉이란 서명조차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가명으로 활동해야 했다. 하지만 가문의 이름을 끝내 빛낸 것은 그의 화업이었다.

 

상처는 상처를 알아본다. 툴루즈 로트렉은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밑바닥 사람들의 일상이나 그곳의 모습들을 작품에 많이  담았다. 주변인이라는 동병상련이었을까.  사창가의 여인들, 댄스홀이나 카바레, 카페 콩세르의 무희, 가수들의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파리 매음굴을 거처로 삼고서  그곳을 소재로 한 그림만도 40여점이나 그렸으며, 채색 석판화도 10점을 제작하였다.  


하층민에게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를테면 세탁부가 그 한 예이다. 19세기 후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던 하류계층 여성들의 상당수는  세탁부와 같은 일에 종사하였다.  세탁부를 그린 화가로는 툴루즈 로트렉 이외에도 오노레 도미에, 에드가 드가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단지 세탁부의 고단한 실상을 적나라한 암울함으로 또는 반대로 화사한 색감으로 가장하여 묘사한다.


툴루즈 로트렉이 그린 세탁부는 그림 바깥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듯이 보인다. 작업대를 짚고서 창밖을 내다보는 순간을 그렸다. 짚고 선 손목에 걸리는 하중이나 모서리를  움켜쥐고 있는 손가락의 악력이 느껴진다. 시선은 머리카락 사이에 감추어져 있다. 대신 꼭다문 입모양새가 뭔가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혹시 이 암울한 현실로부터의 탈주를 다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모델은 붉은 머리 로자이다. 그녀는 이보다 앞서 그린 또다른 그림에서도 등장한다. 여인은 여기에서도 샛노란 창을 배경으로 머리카락 사이에 시선을 감춘 채 다소  수척하고 남루한 모습으로 암갈색 어둠 속에 서있다.

툴루즈 로트렉, 몽루즈에서-로자 라 루즈, 1886-1887, 72.3×49㎝, 반즈컬렉션

  그녀는 과연 탈주에 성공했을까. 어둠 속에서 빛나던 저 환한 창 너머에 사뿐히 이르렀을까. 화가는 아마도 붓질  하나하나에 그 기원을 담아냈던 것 같다. 그 자신 스스로 끊임없이  현실로부터 탈주를  욕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 밤 압생트 같은 독주와 함께하는 환락에 탐닉하는 무절제한 생활로 인해 중간에서 그만 꺼꾸러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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