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 빌헬름 함머샤이
전면 가득 높다란 유리창이다. 한 여인이 한쪽 구석에 서서 여닫이 유리창을 열어 놓고 조용히 밖을 응시하고 있다. 하얀 햇살이 열린 창으로 눈부시다. 그리고 ...... 끝이다. 더 이상의 이야기도 없다. 어떤 조그만 상상이라도 허락할 만한 아무런 단서도 보이지 않는다. 방안은 가구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다. 창밖도 형태를 알 수 없이 뿌연 채 흐릿하다. 하얀 공허이다. 무슨 동양화를 대면하고 있는 듯하다. 색조만 해도 그렇다. 흑백의 무채색 위주로 채색되어 있어, 마치 묵으로 그린 듯 명암조차도 농담(濃淡)으로 표현된 것처럼 보인다. 여백의 미도 엿보인다. 구도는 분명 닫혀 있는 실내 공간에 갇혀 있지만, 창을 가운데로 하여 창밖도 열려 있고 내부 실내도 앞으로 열려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방감이 아니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비어 있음”이다.
사위는 고요하다. 하얀 적요(寂寥)이다. 그림속 여인은 무언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지만 끝내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침묵한다. 그의 그림은 침묵의 시(詩)이다. 하여 보는 이들이 오히려 스스로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 비어 있는 마음속 공간에 자신의 이야기를 채워 나가게 만든다. 마술과도 같은 화가의 신비한 재주이다.
빌헬름 함머샤이(Vilhelm Hammershøi)의 실내 풍경화 그림 대부분은 흑백을 위주로 한 회색톤에 강렬한 흰색 빛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운데, 뒷모습이거나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은 채로 묘사되는 여인이 늘 홀로 등장한다. 그림 속의 실내 배경은 화가가 생전에 살았던 아파트이고, 뒷모습의 여인은 화가의 아내 이다(Ida)이다. 이다는 함머샤이와 학교 친구였던 피터 일스터드의 누이로, 1891년 함머샤이가 27살이었을 때 결혼하였다. 신혼집은 코펜하겐의 스트란트가데 30번지의 아파트였는데, 이사하기 전 이들은 집의 모든 문이나 창, 판넬이나 몰딩을 다 흰색으로 칠하고, 벽과 천장만 회색으로 칠했다. 이들 부부는 함머샤이가 52세에 인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25년을 같이 살았다. 함머샤이 자신도 내성적 성격이었던 데다가 이다의 친정 어머니가 정신 불안 증세를 앓았기 때문에 아내의 유전적 질환 문제로 걱정을 많이 했던 상황 이 그의 그림 정조(情調)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또한 아이도 없었다.
함머샤이의 다른 그림에서는 아내를 모델로 한 여인이 고개 숙인 앞 모습이나 옆 모습으로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크기는 오히려 방안 전경 속에서 한층 더 작아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그 인물도 어느덧 사라지고 빈 방은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만 가득한 부재의 공간이 되어 버린다. 마치 그들의 일생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빌헬름 함머샤이(Vilhelm Hammershøi: 1864~1916) 덴마크 코펜하겐 태생으로 “고독과 빛의 화가”로 불리운다. 그의 회화는 19세기 덴마크에서 과학과 철학, 문학, 예술이 한창 꽃을 피웠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시대상황과 근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침묵의 미학으로 표현하였다. 어느 비평가는 빛을 다루는 그의 빼어난 솜씨와 고요한 가운데 서늘하게 표현되고 있는 고독에 대한 주제의식을 빗대어, 베르메르와 에드워드 호퍼를 섞어놓은 화가라고도 평하였다. 실제로도 빛의 명암처리와 관련하여서는 베르메르와 휘슬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대 덴마크의 보수적 화단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1980년대 이후 스칸디나비아 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속에서 재평가되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2012년에는 그의 작품 <편지 읽는 이다(Ida)>가 소더비 경매에서 170만 파운드(한화 약 30억원)에 팔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