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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잉로빈 Mar 14. 2017

[도서] 편견도 두려움도 없이

누군가는 꺼내야 할 불편한 이야기


솔직한 입담으로 유명한 곽정은 작가의 책 '편견도 두려움도 없이'를 읽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한 번쯤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공감하기도 했고, 찜찜하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였는지 몰랐던 것들을 어느 정도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여성의 시선에서 직선적인 화법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쯤은 이야기해볼 만한 주제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우리 사회가 타인의 외로움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곳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연애하지 않는 사람에게 왜 연애 안 하냐고 물어보지 않고, 비혼주의자에게 결혼을 강권하지 않으며,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부부에게 완벽한 가족상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것 말이다. 외로움은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고 그저 당연한 감정이란 전제하에, 누군가 선택한 자발적 외로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타인의 사적인 영역에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전혀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행복한지에 대한 논의는 별개로 하더라도 말이다. P.30

나이를 묻는 것조차 실례가 되는 문화와 달리 우리는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이력에 대해 묻고 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하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할 때도 자동적으로 그런 패턴이 이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은 잘 하지 못한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상황을 알기도 전에 사회의 통념에 따라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아서, 혹은 자녀가 없어서 문제가 있겠구나 하고 넘겨짚는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자체를 문제로 두지 않는 경우가 많고, 행여나 문제로 여기고 있다고 해도 한번 더 상기시켜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본인이 세운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상황을 판단하여 말하기보다, '그렇구나'하며 편하게 넘길 수 있었으면 한다.



내가 남자였어도 내 나이에 대해 이런 감정을 느낄까 생각해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다. 남자 나이 서른이라고 하면 왠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시작할 것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여자 나이 서른이라고 하면 커리어적 상황보다는 노처녀라든가 결혼이라든가 하는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서른이 넘는 순간, 여성의 가치가 절하된다고 부단히 설득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초혼 연령이 아무리 높아져도, 여성의 가치를 나이로 폄하하고 빨리 가부장제에 편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기죽이려는 목소리는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 오래된 관습이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을 한 경험이 쌓이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내면과 관점도 조금씩 변화한다. 사회 초년생 때 생각한 결혼과 연애의 이상향과, 중간 관리자가 되어서 생각하는 이상향은 달라진다. 내가 정말 살고 싶은 삶의 형태에 대한 입장을 완벽히 정리하는 일에는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오직 여성만이 자신이 거쳐온 시간의 가치를 부정당한다면, 우리는 그 모든 흐름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P.30, P.210

방송에서 중년 여배우의 인터뷰를 보았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젊을 때는 너무 무모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쌓아온 연륜과 안정감이 느껴지는 한 마디라 부러웠고, 나도 언젠가 저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삶을 살든 한 사람에게 무의미한 시간은 없다. 하지만 단순히 '노화'에만 초점을 두어 마치 나이 듦이 죄인양 말하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다. 마치 사람에게도 유통기한이 있는 것처럼, 태어난 지 3-40년이 넘으면 가치가 떨어진다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슬프기까지 하다. 그런 '유통기한'이 누구에게나 적용되지만 여자에게는 더 짧고 가혹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자도 한 사람으로서 가치관과 내면을 성숙시키고 자신의 자리에서 실력을 쌓을 시간이 필요하다. 결혼에 골인하며 마무리되는 동화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성의 삶이 결혼으로 완성된다라고 여기는 것이 아닐까.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한 사람으로서의 삶은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기혼자가 좋은 사람이고, 모든 미혼자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왜 결혼의 유무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여자들은 안다. 단 두세 명만 모여도 우리는 이 더럽고 짜증 나는 경험담으로 몇 분이고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인생을 통틀어 한 번이라도 이런(성추행) 경험을 하지 않은 여자를 찾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여자의 인생은 마치 성추행 옴니버스 영화에 비할 만하다는 것을.

골목길에서, 학교 앞에서, 대중교통에서, 직장에서, 여행지에서... 다녀야만 하고 다닐 수밖에 없는 모든 장소에서 여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이런 경험을 차곡차곡 겪는다. 그리고 언제든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성별임을, 남자를 경계하지 않았을 때 내가 피해자가 되고도 ‘너는 왜 더 조심하지 않았니’라는 힐난을 당할 수 있는 처지라는 것을 내면화하게 된다. 스스로를 억압하고, 늘 경계하고,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고 믿게 된다. P.82

친구들이 모이면 고등학교 때 야간 자율학습을 끝나고 가다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출퇴근을 하며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있다. 이 부분을 읽고 우리가 심심치 않게 대화를 나누던 일들이 사실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일들로 여자들은 항상 무의식적인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그 일을 겪었을 때 어떤 조치도 그 이전으로 돌릴 수 없다는 생각이 불안감을 더 증폭시킨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은 이러한 불안감을 표면으로 끄집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 범죄자의 특성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며 이에 대한 추모와 시위를 과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한 사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비슷한 사건들로 사회의 절반이 불안에 떨어야 한다면 '이제는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결혼식에 대한) 씁쓸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인스턴트한 예식 분위기다.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실천에 옮기기만 해도 큰 숙제를 해결하는 셈이라 굳이 대관료를 많이 내가면서 유난스럽게 긴 예식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까? 긴 예식을 보게 하자니 하객들에게 민폐를 끼친다고 느낀 걸까? 결혼하는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랑을 해왔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결혼식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 사회자가 진행 욕심이 지나쳐 너무 과한 개그를 선보이거나, 주례사가 온통 신랑 신부의 학벌과 경력 사항을 나열하는 지경에 이르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왜 민망함은 내 몫인가’라며  먼산을 보게 된다.
결혼식의 하드웨어는 실컷 구경하고 오지만, 정작 진짜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소프트웨어가 느껴지는 결혼식은 참 보기 어렵다. P.93

'결혼식은 음식이 맛있었냐, 없었냐로 평가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신랑 신부가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소수이고 그 외에는 거의 얼굴 도장 찍고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객의 수가 곧 사회생활 능력을 보여준다고 여겨서 얼굴만 알아도 초대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생의 약속을 하기 위해 고르고 또 골랐을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공들여 화장한 얼굴로 대기실에 있는 신부를 보면 부럽다. 하지만 막상 예식에 들어가면 이러한 나의 부러움을 누그러뜨리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면접관인가 싶을 정도로 신랑 신부의 이력사항만을 줄줄 읊는 주례다. 이 날 만큼은 낭만적인 이야기만 해도 될 듯한데, 두 사람의 사회적인 조건에 대해 굳이 나열해야 할까 싶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책에도 나왔지만, 결혼에 대한 희생을 강조할 때다. 물론 두 사람이 만나 맞춰서 살아가는 데 희생이 필요하겠지만 그런 것을 넘어서 전통적인 남녀 역할을 강조하는 말들이 신랑 신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씁쓸하기만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식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타임에 결혼할 신랑 신부의 이름이 홀 밖에 걸리고 있을 때 결혼에 대한 환상이 부서짐을 느낀다. 결혼식은 한 번의 이벤트에 불과하고 그 이후의 생활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로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왕 하는 거, 어릴 때부터 꿈꿔온 모습과 비슷하게 하고 싶다면 욕심일까. 지금 당장 결혼을 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가 되어서 보는 결혼식은 부러움과 씁쓸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너무 의존적인 여자는 좋지 않다고 말하면서, 또 너무 독립적이면 여자치고 세다고 말한다. P.110

졸업 후 은행에 취업한 선배가 있었다. 그 은행은 신입 사원으로서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 혹독한 합숙 훈련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중간에 많은 사람이 그만둔다고 한다. 선배가 말하기를, 거의 체력을 요하는 교육이 많아서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만두는 편인데 '독하게도' 붙어 있는 여자가 있더라는 말을 했다. 힘들게 취업에 성공해서 잘하고 싶은 마음에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는 여자들을 독하다고 말하는 것이 듣기 좋지 않았다. 남아있는 남자 신입 사원들에게는 독하다고 하지 않는데, 왜 여자에게만 저런 말을 할까 싶었다.

여자라면 어떠해야 한다라는 편견이 이중적인 잣대를 만들고 있다.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타인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이 전혀가 문제가 되지 않을 때에도 '독하다'라거나 '세다'라고 한다. 어쩌면 그러한 평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여성에게 의존적이 되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독하다는 평가와 동시에 의존적인 건 싫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왜 이렇게 국내 여성복은 가녀린 소녀풍 일변도가 되었을까? 나는 그것이 여성의 신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단적 기대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면 무릇 이런 느낌으로 어필해야 그 가치가 올라간다’ 라거나 ‘사랑받기 위해서는 이런 옷이 어울리는 여자여야 한다’라는 기대 말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에 한 번이라도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날이 있을까? 남들이 내 외모에 대해 이야기하든, 내가 남에 대해 이야기하든, 혹은 제3자의 외모에 대해 이야기하든, 우리는 참 많이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대화의 소재로 삼곤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훨씬 많은 것들을 강요당한다. ‘여자가 저렇게 종아리가 두꺼워서 치마는 어떻게 입나?’ ‘가슴에 볼륨이 없으면 여자로서 매력이 떨어진다’ ‘여름이 다가오는데 핫팬츠 입으려면 다이어트 좀 해야겠다’ ‘그런 옷 입으면 남자들이 무서워해, 싫어해’와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내 몸이나 옷차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고 잔소리를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나를 위해 옷을 입는 것인데, 왜 당신이 보기에 좋은 옷을 입으라고 이야기 하나요?" P.144-147

작년쯤에 강남역에서 흰색 티에 검은 테니스 치마를 입고 있는 한 여자를 봤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걸으니 비슷한 옷을 입은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 어디서 단체로 행사를 하나 싶었는데, 그런 여자를 몇 명 더 보고 나서야 유니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를 억제하는 약을 투여해 모두 다 같은 옷을 입고 다니게 만드는데,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원인으로 같은 결과가 나왔구나 싶었다.

유행은 자신이 원하는 옷과 외모를 선택하는 데 편리한 기준이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난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그 유행이 만족스럽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고 불편하다면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의 외모와 옷차림에 만족하며 유행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비난하는 일도 멈춰야 한다.

그 흔한 스키니진과 하이힐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핀잔을 듣고는 한다. 반드시 그런 옷이 아니라도 때와 상황에 맞추어서 나름 깔끔하고 예쁘게 입으면 되지 않겠나 하는 것이 내 생각인데, 모든 사람이 거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타이트하게 입고 높은 신발을 신어야 예쁘다고 권한다. 그리고 그렇게 입어야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말도 들었다. 만일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입는다면, 더 예뻐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남자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입어야 한다는 말에는 따르고 싶지 않다. 내가 입을 옷을 불특정 다수 남자들의 취향에 맞추어 골라야 한다는 것이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어울리는지, 입었을 때 기분이 좋은지, 어디에 갈 때 입어야 괜찮은지 등을 기준으로 옷을 선택하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내 외출의 목적이 단지 남자들의 환심을 사고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닌 만큼 그런 이유만으로 옷을 고를 필요는 없다.



여성의 권리에 대해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면, “너 메갈이지?”라고 물어보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여성의 목소리를 삭제하려는 움직임은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다. P.222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기억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비슷한 속성을 가진 것끼리 묶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범주화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범주의 사람들이 모두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을 고정관념, 그리고 그 특성에 대해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가지는 것을 편견이라고 한다. 범주화는 정보를 처리하는 데 편리하게 작용하지만 고정관념 및 편견으로 이어져 의사소통을 막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기사의 댓글에 종종 보이는 '메갈'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다. 알고 나서 보니 그 단어가 더 눈에 띄었다. 여성에 대한 글과 댓글에 가차 없이 따라붙었고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의견의 답변에도 어김없이 적혀 있었다. 논리적으로 비판하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전혀 무관한 상황에도 무조건 '메갈'이라 칭하며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의 권리를 말하는 사람 = 메갈 =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라는 등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으로서 권리를 주장하면 무조건적인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누구나 문제 제기를 할 만한 상황에도 이와 같은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입을 막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앞으로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기사와 댓글들을 보면 이러한 의문들로 씁쓸함만이 남는다.

  


만약 지금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면 이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길로 접어드는 데에 좋은 도움이 되기도, 또 아주 나쁜 방해 요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문제는 나와 연인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상당 부분 우리 사회의 오래된 입장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는 것이다. 연애를 오래 쉰 여자, 이혼한 여자, 결혼할 짝을 만들지 않고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해 가해지는 사회적 압박은 한국사회에 견고하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정서적 갈망도 갈망이지만, ‘선택받지 못한 여성’이 되어 ‘사회적 배제’를 당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는 연애관계 속에서 여성이 자신감을 잃고 자꾸만 안달하게 되는 존재가 되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 사랑이 계속될 수 있을까?’ ‘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눈 돌리는 것은 아닐까?’ ‘나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아닐까?’ ‘결혼하자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끊임없는 의심과 부정적인 상상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는 점점 사라지게 하고 상대방의 작은 행동에도 끊임없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나는, 나를 책임져 줄 남자가 필요하지 않아. 다만 같이 걸어갈 남자가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댈 수 있는 남자를 찾기보다, 함께 걸어갈 남자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바라보는 경험은 완벽히 달랐다.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남자를 고르는 쪽이 나의 행복과 존엄을 지켜주었고, 나는 그것을 지키는 일에 여전히 큰 기쁨을 느끼고 있다. P.248, P.209

인생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빠지지 않는 건 결혼 시기일 것이다. 몇 살에 누군가를 만나 몇 살까지는 반드시 결혼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사람을 종종 본다. 하지만 나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계획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 무엇을 할지 결정했어도 막상 그 시간이 되면 바뀌는 것처럼, 이 세상에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결혼은 나 자신의 결심 외에 상대방의 마음이라는 큰 변수가 있다.

결혼 시기를 계획할 때 '이 나이에는 결혼을 해야 한다'라는 사회적인 판단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시기가 가까워지면 불안하다. 거기다 주변 사람들이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면 더 조급해진다. 그래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상대방을 다그치기도 하며 스스로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언제 했는가 보다 누구와 어떻게 했는가가 중요한 만큼 결혼 시기에 대한 조급함은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결혼으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한다는 건 꽤나 쓸쓸한 일이다. 내가 캐나다에 짧은 기간 동안 다녀 왔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는 '거기서 캐나다 남자랑 결혼해가지고 영주권 얻어서 살지'였다. 처음 들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라 당황스러웠고 문득 화도 났다. 상대방은 그저 아무 뜻 없이 말했을 수도 있지만, 캐나다 영주권을 얻기 위해 어떻게든지 결혼해 줄 사람을 찾아서 했어야 한다는 말로 들려서 불쾌했다. 그 정도로 영주권을 원할 이유가 없고 결혼할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만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어쩌다 인연이 닿아서 만난 사람이 캐나다인이라 거기서 살게 되었다면 모를까 목적을 다른 데 둔 채 결혼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건 참 비겁하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누군가를 선택하는 것과 계속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결혼을 결심하는 것은 그 결과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열린 작가와의 대화에 참석했다. 곽정은 작가는 우리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집에 돌아가면서 하나씩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나는 스스로를 더 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당함과 차별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이후의 세대는 겪지 않게 조금씩 변화시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깎아내리지 않는 것도 자기 존중에 포함된다. 여자도 할 수 있는 일을 남자가 할 일이라며 미룬 것은 없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남자들이 '이런 건 여자가 하는 일이다'라고 하는 말에는 발끈하면서 정작 '여자니까 나는 그런 거 못해'라며 스스로 선을 긋지는 않았을까.

여성에 대한 권리를 주제로 이야기하면 마치 남성들만 여성에게 편견의 잣대를 들이댄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여성들 중에도 오랫동안 이어온 사회적 편견을 가진 사람이 있고 남성들 중에도 그런 편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남과 여를 통틀어서, 혹시나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내려놓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러한 책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비록 조금 불편한 내용일지라도 누군가는 꺼내야 할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에서 참 용기 있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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