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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잉로빈 Apr 29. 2022

변화와 머무름 사이

영화와 드라마, 공연에서 얻는 선택의 방법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나인틴 헌드레드'는 배에서 태어나 일평생을 그 안에서만 살아왔다. 뛰어난 피아노 연주 솜씨로 인정을 받는 날이 이어지던 중, 승객 중에 한 여인을 우연히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 여인을 만나러 난생처음 육지로 나아가고자 마음을 먹고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한 뒤 계단을 내려가지만 중간에서 멈추고 만다. 눈앞에 펼쳐진 빌딩숲을 한참 바라보며 망설이던 주인공은 결심한 듯이 쓰고 있던 모자를 내던진 후 다시 돌아가 배에 머물게 된다. 결국 먼 훗날 나인틴 헌드레드는 시간이 흘러 낡아진 배와 함께 생을 마감하며 '전설'이 된다.




I was born on this ship. Land is a ship too big for me.
It's music I don't know how to make.
I can never get off this ship.

나는 이 배에서 태어났고, 세상은 나에게 너무 큰 배야.
내가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지 모르는 음악이고.
나는 절대 이 배를 나갈 수 없어.


어떤 선택이나 변화의 갈림길에 있을 때 떠오르는 장면 중 하나다. 어릴 때 이 영화를 처음 보면서 나인틴 헌드레드가 당연히 육지를 밟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안타까움의 탄성이 절로 나오는 선택을 했다.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익숙함에서 오는 안락함과 편안함을 아는 나이가 되었는지 이제는 그의 고민을 충분히 알 것 같다. 육지에 원하는 삶이 있다고 해도 모호하고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긴 시간을 배에서만 지내온 나인틴 헌드레드에게는 불안감은 낮추고 설렘은 키우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에게 선언을 한 뒤 환호를 받으며 혼자 내려가다보니 부담이 큰 데다가 바다와 상반되는 빽빽한 빌딩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 매일 조용한 밤이나 새벽 시간에 누군가와 함께 잠시 배에서 내려 주변을 산책하는 것부터 시작했더라면 다른 결정을 했을지도 모른다. 불안을 느끼는 상황을 정도에 따라 단계별로 나누어 하나씩 경험하면서 극복해나가는 방법을 심리학에서는 '점진적 노출법'이라고 한다. 그러다보면 자신이 생각하던 극적인 상황이 사실은 위험 요소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 서서히 불안감을 해소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인틴 헌드레드의 행동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쩔 때는 마음이 편한 방향이 가장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인틴 헌드레드가 육지와 그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듯 모자를 던질 때 살짝 미소를 짓는 걸 보고 스스로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구나 싶기도 했다. 만일 육지에서의 생활을 선택했다고 해도 마냥 행복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 후 배 안의 삶에서 나름 만족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더불어 그의 결정으로 인해 이 영화의 여운과 애잔함은 배가 되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싶기도 하다.





You wrote down all these things to say goodbye to,
but so many of them are good things.
Why not just say goodbye to the bad things?
Say good bye to all the times you felt lost,
to all the times it was a ‘no’ instead of a ‘yes’,   
to all the scrapes and bruises,
to all the heartache.
Say goodbye to everything you really want to do for the last time.

네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들은 대부분 좋은 것들인데,
반대로 널 힘들게 했던 것들에 대해 적어 보는 건 어때?
상실감을 느꼈거나 긍정보다 부정의 대답을 들어야 했던 순간들,
긁히고 멍든 상처와 아픈 마음도.
정말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것들을 떨쳐내는 거야.


미드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How I met your mother)'에서 나온 대사다. 테드가 뉴욕에서 시카고로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리스트를 보고 그의 친구인 릴리가 한 말이다. 주변 사람들이 새로운 생활의 문턱에서 혹시나 다가올지 모르는 문제들로 인해 걱정할 때, '오히려 지금보다 더 좋은 일들이 생길 수도 있잖아'라고 이야기를 해주고는 한다. 그러는 나도 사실은 변화 앞에서 기존의 것은 미화되고 새로운 것은 단점이 부각되는 경험을 한다. 이런 좋은 점들이 있는데 그걸 두고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맞을까에 대해 생각할 때 이 장면이 생각난다. 사실 변화를 머릿속에 떠올렸다는 것은 현재 무언가 벗어나고 싶은 요소가 있음을 의미하지만, 막상 결정을 고민하는 시간에는 좋았던 점만 크게 부각되어서 그런 것들은 가려지게 된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시간이 흘렀을 때 후회를 적게 하기 위해서는 극복하고 싶었던 요소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My destiny calls and I go,
and the wild winds of fortune
will carry me onward.
Whithersoever they blow,
onward to glory I go.    

운명이 이끄는 대로 간다.
행운의 바람이 불어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영광을 위해 가자.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넘버의 가사다. 가끔 점진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일 시간 없이, 어쩌면 필수적으로 맞이해야 할 상황이 있다. 아니면 분명 바라오던 순간임에도 두려움이 생길 때에는 이 노래 가사가 도움이 된다. 그저 내려놓고 변화를 즐기는 것이다. 내 운명이 그런가보다 하며 이끌리는 대로 가다보면 좋은 일이 생기고, 언젠가는 그러길 잘했다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변화를 선호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 낯익은 것에 대한 정이 커질수록 새로움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삶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현재 수준에 멈춘 채 다가오는 기회와 행복을 놓칠 수도 있다. 머무를 때와 흘러야 할 때를 알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어느 쪽이든 용기가 있어야 한다. 현재 시점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래의 내가 '진작 할 걸' 혹은 '그러지 말 걸'이라고 할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고, 혹시나 후회되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당시의 나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믿음은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변화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망설이게 될 때는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소소하게 정든 것들이 발목을 붙잡을 때는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가, 원하던 순간이 막상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주춤하게 되거나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을 때는 '맨 오브 라만차'를 떠올리고는 한다. 크고 작은 선택의 시간이 이 세 장면에 모두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화면 속의 등장인물을 보는 것처럼 내 모습과 상황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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