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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잉로빈 Jan 28. 2024

어느 평범한 탐서주의자

우연히 문장에서 정체 발견



탐서주의자(耽書主義者), 책의 소유를 삶의 유일지상의 목적으로 삼고 책 내용보다는 책 자체를 중시하며 책을 진(眞)과 선(善) 위에 두는 사람. - 표정훈《탐서주의자의 책》


날마다 문장이 하나씩 적힌 다이어리를 통해 ‘탐서주의자’라는 단어를 알았다. 검색해 보니 사전에도 있어서 신기했다. 정의는 ‘책 읽기를 즐기거나 책을 수집하는 데 푹 빠져 있는 사람’으로 등록되어 있다.

오래전, 인형을 좋아하던 내가 ‘키덜트’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든다. 이제는 그 단어와 조금 멀어졌으나 스스로 정체를 발견한 듯한 반가운 느낌은 유사하다. 진정한 명칭을 부여받기에는 어설프더라도 나름 책에 대한 애정이 있다.


전자책이 보편화되고 편리한 점도 있지만 학습 목적이 아니라면 종이책을 훨씬 선호한다. 표지, 크기와 무게, 종이 질감, 여백 및 서체 등이 그 작품 자체를 말해주는 기분이 들어서다. 책을 열고 처음으로 마주하는 색지나 가름끈 색상과 같은 부분도 출판사에서 도서에 맞춰 고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느 것 하나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책은 대여하기보다 구입해서 읽는 편이다. 보통 2주 내지 4주의 대여기간이 마감기한처럼 작용하여 미루지 않는 장점은 있으나 때로는 급하게 읽어서인지 기억하기 어렵다. 내 책이 아니다 보니 인상 깊은 구절을 발견하면 페이지 번호를 별도로 메모해 두었다가 사진을 찍거나 베껴 적어 보관하지만, 나중에 앞뒤 맥락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면 다시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찾아보기도 한다.

새책뿐만 아니라 중고책도 자주 구입하는데, 최상 및 상 등급으로 분류된 도서는 품질이 꽤나 괜찮은 편이다. 읽고 싶은 책이 생길 때마다 목록에 적어놓고, 중고매장 근처에 갈 일이 있을 때 한번씩 재고를 검색해 보거나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온라인으로만 보던 책을 받은 후 박스를 뜯는 순간 더 예쁜 실제 모습에 종종 감탄한다. 그러고는 하나씩 주워 들고 책장에 분류하여 꽂을 때 참 행복하다. 나름 세운 기준은 시, 소설, 에세이, 심리/철학, 역사/문화유산/예술, 글쓰기, 언어, 기타 학습 등이다. 공간이 그리 넓지도, 책이 아주 많은 것도 아니지만 관심 분야를 모아 정리하면 뿌듯하다.

일반적인 크기와 달라서 북커버를 씌워 읽기 어려운 책이나 표지가 밝은 책, 오랫동안 두고 보아야 하는 책 등은 어릴 적 교과서 싸듯 투명 비닐로 감싼다. 공부 용도가 아닌 이상 직접 밑줄을 긋거나 필기는 하지 않고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 나오면 흔적 없이 뗄 수 있는 마스킹 테이프로 표시한다. 책을 아껴서 그렇기도 하지만 새책은 나중에 중고로 내놓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왕이면 깨끗이 보게 된다.


독서나 구입 목적이 아니라 해도 단순히 책이 모인 서점 혹은 도서관에 들어서면 특유의 향과 분위기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얽힌 추억들 덕분인지도 모른다. 어릴 때 가족들과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 들러 책을 구경하고는 했다. 당시 입구에는 조선 궁궐에서 볼 법한 커다란 나무 대문이 있었고 내부는 상당히 넓어 보였다. 사실 책보다도 다 같이 어딘가로 나들이 간다는 것 자체가 좋았기 때문에 약간의 지루함을 감수했다. 체감상 앉은자리에서 거의 한 권을 읽고 있는 듯한 언니 곁을 맴돌며 내 연령보다 높은 수준의 책들을 보는 척했다. 나도 얼른 자라 작은 글씨로 적힌 문장들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햇살이 비치는 한가한 오후, 요즘에도 가끔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대학 시절 공강 시간이면 도서관에 가는 걸 좋아했다. 엄청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 같지만 실상 그렇지는 않았고 북적이는 가운데 조용한 공간을 찾아 머무르는 느낌을 즐겼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햇빛의 온기를 받으며 책을 보거나 엎드려 자고 있는 동안 바깥 운동장에서 축구공 차는 소리가 새어 들어오고는 했다. 그러면 마음이 일상 속 평온함으로 가득 찼다.


가끔 내가 책의 내용을 즐기는 건지 그저 전체적인 특성을 좋아하는 건지 혼란스럽다. 작년 기록을 보면 22권, 대략 부풀려 한 달에 2권 읽은 것인데 일 년에 서른 내지 몇백 권까지 읽는 분들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많이 읽지 않아서도 있지만 사실 빠르게 장을 넘기지 못하는 편이다. 문장 하나에 머물러 곱씹고, 표시하며 다시 읽다 보면 진도가 그만큼 더디다.

독서 전문 인스타그램 계정과 유튜브 채널을 보며 많이 배운다. 운영자의 독서량, 다양한 선정 도서 분야, 깊은 서평에 감탄할 뿐만 아니라 책과 작가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특히 작가의 일생 및 특성을 통하여 작품을 이해하거나 평소 관심 있던 주제와 관련된 책들을 연결하다 보면 시야가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가지고 있는 책 중에도 안 읽은 것이 많지만 호기심은 점점 커져 구입하고 싶은 책 목록은 늘어만 간다.


이번 주말에는 마음먹고 책장 정리를 했다. 예전부터 꽂혀 있었으나 펼쳐본 지 오래된 인쇄물은 버리고 추가로 작은 책장을 조립하여 미래에 구할 도서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서점 및 도서관에 비하면 서가 하나에 불과한 양이라 해도 책으로 나의 공간을 채우며 그곳에서처럼 아늑함을 느낀다.

수집 과정도 즐겁지만 어디까지나 책은 그 내용의 가치를 알아주는 주인을 만날 때 비로소 빛이 난다. 더해나갈 책만큼 보유한 책도 소중해서, 가지고 있는 도서 목록을 만들어 지나치게 묵히거나 잊어버린 건 없는지 가끔씩 살펴보고 있다. 처음 들여올 때의 설렘이 바래지 않도록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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