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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ying Shrimpy Jun 01. 2024

출산 직후라 드는 생각 7가지

아기를 낳았다!

출산 이전도 출산하고 한참 지난 후도 아닌, 출산 '직후'라 드는 끊어진 생각 몇 가지.




1. 인생 계획대로 안 된다. 


제왕절개수술로 아기를 낳기로 결정한 후,

수술 가능한 날짜 열흘 정도를 병원에서 받아서 철학관에 들고 가 '택일'이라는 것을 했다.

병원에서 준 날짜 중 모든 것이 다 좋을 수 있는 날은 없어서(생각해 보면 택일해서 태어난 사람들 다 잘 풀리면 세상에 힘든 사람 별로 없을 듯...), 

큰 굴곡과 불운만 피해서 무난하게 살 수 있다는 날짜이자, 넉넉하게 출산예정일보다 열흘 정도 빠른 날로 정했다.


그런데 택일한 날보다도 나흘 일찍, 즉 예정일보다 2주 일찍 양수가 터졌다.

급히 담당선생님께 연락드려서 병원으로 향했고, 어차피 정해둔 날에 낳을 수 없고 양수도 터졌으니 자연분만을 도전해 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고통스러운 내진과 3시간의 진통을 겪어보니 도저히 못할 것 같아 원래 예정했던 대로 수술로 아이를 낳았다.


인생 계획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여러 번 느낀 적 있지만, 이번에 새삼 또 한 번 깨달았다.


2. 열심히 공부해 본 경험은 생각지 못한 곳에 도움이 된다.


나는 초유만 먹이고 완분, 즉 분유만 먹이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여느 산모와 같이 병원과 조리원의 모유라이팅에 살짝 마음이 흔들리고 있지만...)


그렇게, 초유가 나오는 기간인 출산 3일 차부터는 유축의 길로 들어섰다.

새벽에도 매일 3~4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서, 지친 보호자가 깨지 않게 불을 꺼놓고 커튼을 쳐놓고 유축을 했다.

말이 3~4시간 텀이지, 준비하고, 유축하고, 뒷정리하고, 신생아실에 젖병을 갖다 드리면 40분은 족히 필요하고, 첫 며칠은 미숙해서 훨씬 더 오래 걸렸다. 

그리고 깼다가 바로 다시 잠들기도 쉽지 않아서, 결국 유축을 시작하고 사흘 정도는 하루에 쪽잠 시간을 합쳐 2~3시간 정도 잔 것 같다.


몸도 지치고 새벽에 유축기의 펌프 소리를 들으며 현타도 왔지만, 대학원 시험기간 때처럼 끝이 있는 과정이라 생각하면서 견뎠다.

'나는 내일 닥친 시험이 있다. 오늘 새벽까지만 딱 버티고, 시험시간에 불태우고, 오후에 끝내주는 낮잠을 잘 것이다.'라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1시, 4시, 7시... 이렇게 계속 유축을 했다.

(현실은 당시 시험기간 때처럼 밤에 한두 시간밖에 못 자니 오후에 오히려 아드레날린 폭발해서 낮잠도 못 잠...)


3년간 매 학기 2번씩, 가끔 열람실에서 밤을 새기도 하고 여학생휴게실에서 1시간 알람을 맞춰놓고 쪼그려자보기도 하던 대학원 시험기간을 거쳐보지 못했다면, 이번에 정신적으로 더 힘들었을 것 같다.

열심히 공부해 본 경험이 생각지도 못한 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3. (위 2와 연결되는 것인데) 모든 것은 처음이 어렵다.


제왕절개수술은 후불제 고통이라고들 한다.

출산 전 진통을 거의 겪지 않아도 되고 마취 상태에서 아기를 꺼내기 때문에 수술 전이나 수술 중에는 괜찮지만, 수술 후 마취가 깨면 수술부위가 불타는 듯하고 움직이면 장기가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수술 후 무조건 많이 움직여야 회복이 빨라, 이런 후불제 고통기간을 최대한 단축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수술 직후 마취 기운이 좀 남아있을 때 발을 까딱거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리를 조금 접었다 폈다 해보기도 하고, 몸을 조금씩 옆으로 돌려보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무통주사 밸브가 제대로 열려 있지 않아 무통이 듣지 않고 있었는데(...)

그때가 마침 처음 몸을 옆으로 돌려보려고 시도할 때라 너무 아파서 눈물이 줄줄 났다. 

그래도 꾹 참고 침대의 양 옆 철제가드를 잡고 몸을 살짝 움직여보고, 다음 날부터는 상체를 일으켜 보고, 오후에는 발을 땅에 대어보고, 화장실까지만 걸어보고... 이런 식으로 조금씩 움직였더니

수술 2일 차부터 수액걸이 없이 복도도 쉽게 걸어 다녔고, 3일 차부터는 계단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앞서 이야기한 일련의 유축 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허둥대고 유축 타이밍이 되면 시작하기 전부터 눈앞이 깜깜했는데, 

이틀째쯤 되니 불 꺼진 방에서 새벽 4시에 착착 준비하고, 유축하고, 신생아실에 갖다 드리는 것까지 30분 안에 끝내고 다시 누워서 비교적 수월하게 다시 잠에 드는 나를 발견했다.


생각해 보니 공부할 때도 그랬다. 

모든 수험서는 첫 페이지나 첫 챕터 시작이 어려웠고, 속도가 붙으면 쭉쭉 읽어나갈 수 있었다.

회독 수가 올라가면 완독 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고.


모든 것은 처음이 어렵지, 루틴화되면 수월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3. 시원섭섭하다.


임신 기간 동안 다행히 임신중독증, 임신성당뇨 등 큰 이벤트는 없었지만

거의 열 달 내내 지속된 입덧, 무거운 몸, 쉼 없이 돌아가는 업무, 임신성 비염, 불면증 등

임신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겪는 여러 종류의 힘듦 때문에 임신 기간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제발 빨리 나와만 주라...'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실제로 아기가 세상에 나오니

아기의 활발하던 태동도, 딸꾹질도, 쉬하면 느껴지는 부르르 하는 느낌도 안 느껴져서 서운했다.

수술한 날 밤에는 이제 더 이상 배 속에 아기가 없는데도 아기가 늘 딸꾹질하던 자리에서 딸꾹질이 느껴지는 환촉(?)이 느껴질 정도.

 

특히 수술 2일 차에 담당선생님께서 초음파로 텅 빈 자궁 속 흰 부분을 가리키면서 

'여기가 아기가 있던 공간이에요~' 하시는데 순간 너무 허전해서 울컥했다.


그래도 지금 실제로 만나서 보고,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어 행복한 게 더 크다! 


4. 호르몬의 노예가 되었다.


수술실에서 간호사 선생님께서 처음 아기를 보여주시면 눈물이 폭발할 줄 알았는데

그냥 살짝 벅참... 눈물 또르르... 정도여서 '아, 역시 나는 호르몬에 지배당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 2번의 유축에서 공기만(ㅋㅋ) 나온 후, 

3번째 유축이었던 새벽에 1ml나 될까 한 초유 몇 방울을 젖병에 담아 신생아실 간호사 선생님께 건네드리면서 쭈뼛쭈뼛 '저 이것도 괜찮으시면...견출지 주시면 이름이랑 유축시간 쓸게요.'라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아 괜찮아요! OOO 산모님이시죠? 마침 아기 먹일 시간이니 이거 바로 먹일게요.'라고 활짝 웃으면서 말씀해 주시는데 눈물이 찔끔 났다.

그게 뭐라고 감동받아서.


그 후, 신생아실 면회를 가면 늘 자고 있던 아기가 처음으로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나와 아이컨택을 해주었을 때도 눈물 폭발...


어디선가 들었는데, 엄마는 임신 기간 동안 여성 호르몬이 폭발하다가 출산 직후 호르몬 수치가 급하락 하면서 자주 우울하고 감정이 요동친다고 한다. 

나 역시 그 과정을 겪고 있는 듯하다.


5. 엄마는 위대하다. 나 말고 우리 엄마.


타지에 있는 남편은 일주일에 한 번만 올 수 있어서, 결국 출산 당일부터 조리원에 들어오기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엄마가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아직 일을 하고 계신 엄마는 5박 6일 간 낮에는 출근하고, 퇴근하고 오면 거동이 불편하던 나를 씻겨주고, 같이 아기를 보러 가주고, 진료에 동행해 주고, 집에 들러서 내가 놓고 온 짐을 가져다주고, 밤에는 같이 자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챙겨주었다.

나와 엄마 모두 입원 기간 동안 수면부족에 업무(?) 과다였는데, 타고난 체력이 약한 엄마는 결국 내가 퇴원하고 엄마가 집으로 돌아간 날 골병이 났다. 그간 정신력으로 버틴 것이다.


산후조리가 끝나고 복귀하는 날에 크게 선물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부디 이 마음 잊지 말자...!


6. 내 몸이 인간을 만들다니?


지난 30+n년간 나는 내 몸을 - 물론 건강의 소중함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 '전시용'으로 더 자주 생각했던 것 같다.

건강한 생활습관을 핑계로 늘 식단관리와 운동을 해왔지만, 밑바닥 본심은 보여주기용도 있었지.


그런데 임신 기간 동안 주기적으로 검진을 가면서 세포였던 아기가 점점 사람의 형상을 갖추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 수술실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아기에게 모유를 먹일 때 등등

내 몸은 형태로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 기능이 중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7. 아기가 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아기를 낳은 지 일주일쯤 되었는데, 

앞선 글에서 쓴 것과 같이 SNS를 끊은 상태라 카카오톡에만 올렸는데도

시험 합격, 결혼 등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몇 년간 연락 안 하고 지내던 지인들까지 연락이 와서 덕담을 건네주어 마음이 따뜻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임신 기간에도 임신 소식을 알자마자 진심 어린 축하와 선물을 보내준 지인들과 가족들이 많았지.


아기의 힘은 생각보다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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