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다스리는 동양고전의 명문장 25선
10년 지기 친구 P와 나는 서로 간 전통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해마다 연말이 되면 일력을 2개 사서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2023년 연말에는 '민음사 2024 인생일력'을 2개 주문해서 하나는 우리 집으로, 하나는 P의 집으로 보냈다.
https://minumsa.minumsa.com/book/24998/
아침에 일어나면 한 장씩 뜯어서 (민음사 피셜) '일상을 다스리는 동양고전의 명문장'을 읽고 출근했다.
바쁜 날에는 들여다보지 못해서, 열흘쯤 지나 10장을 한꺼번에 뜯을 때도 있었다.
어느 날 또 다른 친구 D가 집에 놀러 와서 책상에 놓인 일력을 보더니, '어 나도 이거 있는데!'라며 자기가 다이어리에 늘 소중히 지니고 다니는 한 장을 보여주었다.
나도 2024년이 끝나갈 때즈음 365장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문장을 추려서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2025년 새해가 밝은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여러 마음이 좋지 않은 소식에 새해를 맞는 기쁨을 실감하지 못한 것도 있었고, 건강 문제로 퇴사를 결심하게 되면서 담당 사건들을 인수인계하고 의뢰인들께 인사도 돌리는 등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시의성이 중요한 주제인 만큼, 더 늦어지기 전에 2024 인생일력에서 내 기준 '일상을 다스리는 동양고전의 명문장 25선'을 꼽아보고 카테고리를 나누어 보았다.
모아놓고 보니, 갈무리해 둔 문장들 중 죽음에 관한 것이 가장 많았다. 요즘 '웰다잉(Well-Dying)'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사람은 살다가 관을 덮어야 결론이 나는 법이니, 하루라도 아직 죽지 않았다면 그 하루만큼 아직 근심과 책임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 명사
'풀은 봄에 무성함을 고마워하지 않고, 나무는 가을에 잎이 짐을 원망하지 않는다. 내 삶을 잘 살아야 내 죽음이 훌륭해진다. 그 부쳐 사는 것을 잘한다면 돌아감 또한 훌륭하게 되는 법이다.' - 신흠, 부쳐 사는 인생
'우리는 우환 가운데 살고 안락 가운데 죽는다.' - 맹자
'천하 사람이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미워한 것이 오래되었다. 내게 다만 이 몸이 있는 까닭에 이 병이 있는 것이니 몸이 없고 보면 병이 장차 어찌 붙겠는가? 그런 까닭에 삶은 진실로 즐길 만하고 죽음 또한 편안하다.' - 조구명, 내가 병에 대해 느긋한 이유
'혈기가 있는 존재라면 사람부터 소, 말, 돼지, 양, 곤충, 개미에 이르기까지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다 같습니다. 어찌 큰 것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것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 이규보, 이와 개의 목숨은 같다
'삶이란 떠 있는 것. 죽음이란 휴식하는 것. 깊고 그윽이 명경처럼 관조할 줄 알되 자유자재로 떠다니는 배처럼 묶이지 말도록.' - 가의, 복조부
'푸른색으로 물들이면 푸르게 되고, 노란색으로 물들이면 노랗게 되며, 오색으로 물들이면 오색이 된다. 물들이는 색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 묵자
'권세와 이익, 인맥과 사치를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 하지만 가까이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은 그보다 더 깨끗하다.' - 홍자성, 채근담
'자신의 직위에서 묵묵하게 근신하며 일하고 바르고 곧은 자들과 교제하라.' - 시경
'먼저 가려고 지름길 택하니 그 심보가 고약하고, 뒤에 처져서 대화 나누니 그 맛이 길게 간다.' - 소강절, 인자음
'말을 아끼고 저절로 그러함에 맡겨라.' - 노자
'말 아끼기'는 매해 다짐하는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매해 말수가 적어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말이 간결한 자는 도에 가깝다.' - 이이, 격몽요결
아이는 나무처럼, 화분처럼 키우기. 임신 때부터 마음에 새기고 있다.
'나무를 처음 심을 때는 자식을 아끼듯 하되, 심은 후에는 버린 것처럼 하라. 그러면 나무는 천성을 보전하고, 그 특징을 발현할 수 있을 것이다.' - 유종원, 종수곽탁타전
'감히 억지로 통하려 하지 않고 우선 한쪽에 밀쳐 두었다가, 가끔 다시 그 문제를 끄집어내어 마음에 어떤 사념도 없애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스스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그렇게 하고 내일도 그렇게 한다.' - 이황, 도산기
변호사가 되기 전 다니던 직장에서 신입사원 때 직속 사수가 본인이 새기고 있는 문장이라며 알려준 것이 일본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유쾌하게.'이다. 지금도 모니터 밑에 붙여놓고 서면을 쓰다 막힐 때마다 들여다보는 문장이다. 아래 정조의 문장도 비슷한 맥락인 듯하다.
'어려운 곳을 보면서 쉬운 곳부터 손대야 한다' - 정조, 홍재전서
'많이 들어 박식하면 자주 막히게 되나니 차라리 고요함 지키는 것만 못하다.' - 노자
'내가 일찍이 저 조각구름 아래에 있을 때는 한 단계 올라가면 높은 곳이 더 없을 만큼 높다고 생각하고 한 단계 내려가면 낮은 곳이 더 없을 만큼 낮다고 생각했으니, 너무도 우습지 않았던가?' - 김윤식, 윤필암원망기
스스로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편인데(대충 인성 별로라는 뜻), 새해에는 그 반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사람이 지극히 어리석어도 남을 꾸짖는 데는 밝고, 아무리 총명해도 자기를 용서하는 데는 어둡다.' - 소학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따지면 따르는 무리가 없다.' - 대대례기
'사소한 행동이라 하더라도 매번 과오가 많으니, 만약 그것을 기록하여 거울로 삼지 않는다면, 오십 세가 되었을 때 어찌 지난해의 잘못을 알겠는가. 이것이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 조소앙, 동유약초
'네가 방 안에 있을 때를 살펴보라. 깊숙한 어두운 방구석에 대해서도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네.' - 시경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 화엄경
위 화엄경 문장의 의미를 체감한 순간에 대하여 짧은 글을 썼다(https://brunch.co.kr/@flyingshrimpy/29).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라. 선한 업의 결과들이 지속되도록 노력하라.' - 티베트 사자의 서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니, 이렇게만 수행해도 심오하고 심오하다. 세인에게 알려 줘도 누구 하나 믿지 않고, 도리어 몸 밖에서 부처를 찾는구나.' - 왕양명, 도를 묻는 이에게 답하다
'마음이 곧 부처임을 모르다니,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 이와 정말 비슷하다.' - 경덕전등록
또 한 해가 가고 한 살을 더 먹었다(이제 만 나이로 바뀌어서 생일이 지나야 하지만, 아직도 왠지 새해가 되면 한 살 더 먹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연말이 되면 뒤를 돌아보거나 아쉬워하기보다는 '올 한 해도 알차게, 행복하게 잘 보냈다.'라고 생각하면서 다음 해를 즐겁게 기다리는 편인데, 2024년 12월에는 주변도 내 마음도 소란한 일이 많아서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부디 2025년은 모든 것이 조금 더 나아지길.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