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ying Shrimpy May 22. 2016

마음 가는 대로 하자.
적어도 여행 중일 때만큼은

비포 선라이즈 같은 순간이 찾아올지도

혹시나 해서 챙겨 온 핫팩을 여행 첫날 밤부터 붙이고 잤다.

방에는 냉기가 한가득 돌고 밖은 비바람이 치는데, 라디에이터 하나 달랑 있었다.

2월에 선풍기는 왜 둔건데...
방이 깔끔하고 좋긴 했지만
...너무 추워서 예쁘게 담아준 얘네까지 덮고 잤다.


밤 비행기로 리스본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찾고, 겨우 만난 우버 아저씨 도움으로 숙소에 도착하니 새벽 1시.

숙소는 방 6~7개, 화장실 2개, 다이닝홀, 부엌 정도로만 이루어진 작은 게스트하우스였다.


시차와 추위와 낯섦으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주인이 구경시켜 준 다이닝홀이 눈에 띄었다.

테이블과 의자가 중세시대 유럽의 방 가구처럼 등받이가 높고 화려한데다, 작은 테라스도 있어서 날이 밝으면 뷰가 멋질 것 같았다.

내일 아침은 저기 창가 자리에 앉아서 먹어야지, 하며 오들오들 떨면서 잠이 들었다.




안녕


샤워를 하고 조식을 먹기 위해 홀로 들어서자, 내가 전 날 밤 찜해둔(!)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가 웃으며 인사를 했다.


-(거기 내 자린데) 응. 안녕

-너도 혼자 왔어?

-응. 어제 밤에 도착. 너는?

-나는 사흘째. 휴가야? 출장?

-휴가. 한국은 지금 긴 연휴거든.

-잘 왔네. 여기 정말 좋아.


...


한 30분은 대화한 것 같은데, 웃기게도 대각선으로 놓여 있던 각자의 테이블에서 둘 다 내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억양에서 대충 짐작은 갔지만) 어디에서 왔냐고 하니, 독일이라고 한다.

편견이지만 나도 모르게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해버렸다. 이탈리아나 스페인 애였다면 냉큼 접시 들고 내 테이블로 와서 수다를 떨었을 텐데.


-퓌센에 있는 노이슈바슈타인 성 알아? 난 독일 사람인데도 거기 2달 전에 여자친구랑 처음 가봤어.


아, 여자친구.

내심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재치도 있고 대화하다 보니 나름의 여행 철학도 있는 것 같아서, 금사빠인 나는 그새 호감이 생겼나 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젊은 프랑스인 커플이 들어와서 우리 사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핑퐁 같던 우리 대화는 잠시 끊겼다.


... 머쓱하다.

다 식은 커피를 그제야 한 모금 마시려는데,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 뭐지? 드디어 같이 앉아 먹으려는 건가?!


-덕분에 즐거운 아침이었어. 여행 잘 해.

-고마워. 너도.


쳇.

걔가 홀을 나선 뒤 그제야 들고 온 책을 처음으로 휘리릭 넘겼지만, 내용이 눈에 들어올 리가.

아, 같이 앉아서 먹자 할 걸.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물어봤다.

자책하며 조식을 마무리하고, 클리닝 레이디에게 드라이기를 빌려 머리를 말리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 또 만났네

-?

-아, 여기 세면대랑 샤워실 부분은 공용이야

-ㅋㅋㅋ

-ㅋㅋㅋ


가까이서 보니 눈동자는 하늘색.


-리스본엔 언제까지 있어?

-지금 준비하고 포르투로 바로 가려고. 리스본은 수요일에 다시 와서 여기서 한국 가는 비행기 탈 거야.

-난 수요일에 떠나는데. 혹시 생각 바꿔서 일찍 오게 되면 연락 줄래?

-그래!


그렇게 얘 방 앞에서 서로 페이스북 친추를 하고, 나는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하고 포르투 가는 기차를 타러 나섰다.

날씨가 흐렸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아.

머무르는 내내 포르투갈 전국에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보고 오긴 했지만.




사흘 뒤, 우린 정말 리스본에서 다시 만났다.

작가의 이전글 글을 쓸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