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잘 모르겠고
패션의 ㅍ자도 모르는 내가 유행을 언급하다니 민망하다.
그렇지만 '유행은 돌고 돈다.'라는 말을 작년부터 몸소 느끼고 있다.
10년이 넘은 내 낡은 물건들이 다시 빛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14년 전, 교환학생으로 간 미국에서 철없이 아빠카드를 흥청망청 쓰면서 지내던 때였다.
또 뭐 살 거 없을까... 하고 한 쇼핑몰을 기웃거리다 들어간 잔스포츠 매장에서 보라색 백팩을 발견했다.
10달러쯤 주고 산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백팩을 쓸 일이 별로 없었고, 혹시 있어도 당시 유행하던 다른 브랜드 백팩을 들었다.
내 잔스포츠 백팩은 그렇게 몇 번의 이사를 다니는 동안 붙박이장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
그러다 작년 초, 기사가 뜨기 시작했다.
“넌 왜 이렇게 유행에 뒤쳐지니”…20년전 이모 가방, 조카들 필수템 됐다 - 매일경제
(이모는 맞지만 백팩을 멜 만큼 장성한 조카는 없습니다만...)
잔스포츠를 유통하는 무신사의 홍보 전략이었겠으나, 그 뒤로 눈에 띄게 잔스포츠 백팩을 멘 학생들이 자주 보였다(위 기사로부터 1년이 지난 오늘도 집에서 카페까지 걸어오는 10분 동안 나 말고도 잔스포츠 백팩을 멘 사람을 2명이나 봤다).
나도 내 잔스포츠 백팩을 꺼내어 먼지를 털어보니, 아직 지퍼도 멀쩡하고 천도 흠 없이 온전했다.
가볍고, 튼튼하고, 수납공간이 매우 넉넉해서 아기를 데리고 장거리를 이동할 때 등 짐이 많을 때 유용하게 쓰고 있다.
그렇다. 다들 이것만은 안 된다던 그 바지가 돌아오고 있다.
지난달에 전소미, 김태리 등 연예인들이 공항패션에서 입고 나타났을 때도 사람들은 설마설마했을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입어버렸다. 지디가.
2025 데님 트렌드의 귀환, 스키니진 정말 유행할까?(feat.지디) | 얼루어 코리아 (Allure Korea)
유행을 선도하는 지디에게 스키니진만은 다시 입지 말아 달라는 댓글을 예전에 본 기억이 난다.
하체에 딱 달라붙는 스키니진은 불편하기도 하고 몸의 형태를 가감 없이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드디어 때가 왔다.'라고 생각했다.
2009년쯤이었을까, 소녀시대의 명곡 'gee'를 필두로 스키니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그 옷이 너무 입고 싶었지만, 상체는 빈약하고 하체는 튼튼한, 흔히 말하던 '하체비만'이었던 내 체형은 다른 건 몰라도 스키니진만은 피해야 했다.
그때 유행하던 (지금 생각하면 매우 부적절한 말이지만) '옷에 몸을 맞춰라.'라는 말에 따라 스키니진을 여러 벌 사두고 열심히 다이어트를 했지만, 안 그래도 살이 별로 없던 상체와 얼굴만 계속 빠질 뿐, 하체는 그대로였다.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어서인지 운동을 계속 해서인지 하체 살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고, 작년부터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살이 한 차례 극단적으로 빠지자 스키니진이 썩 잘 어울리는 체형이 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스키니진의 유행은 지나가고, 부츠컷, 와이드 팬츠, 조거 팬츠를 거쳐 지금은 뭐든 통이 넓어 편한 바지가 대세가 된 것 같다.
나 역시 그게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여기지만, 한편으로는 '10년 넘게 기다려 이제야 스키니진이 어울리는 몸이 되었는데... 한 번쯤은 유행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한 번쯤'이 드디어 온 것이다.
그 사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사 모으던 스키니진 몇 벌은 유행에 상관없이 자주 입다 보니 내 체형에 맞춰 살짝 늘어나 편해지기까지 해서, 당분간 주말은 스키니진을 돌려 입으면서 지낼 것 같다(가을, 겨울에 자주 신는 어그부츠, 롱부츠와도 잘 어울린답니다).
예전 스타일이 유행한다고 해서 진짜 내가 예전에 입고 쓰던 그 스타일의 물건을 꺼내면, 이상하게 태가 나지 않아 결국은 새로 사야 한다는 푸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20대가 아니고, 아기 엄마까지 된 소위 '진짜 아줌마'다.
태가 나든 나지 않든, 내게 편하거나 그동안 내가 입고 싶었던 옷이면 마음껏 입으면 그뿐이다.
특히 일할 때 거의 정장 셋업밖에 입지 못해서 캐주얼한 옷은 새로 사기도 아깝고 옷을 잘 고를 줄도 모르는데, 잘 보관해 두던 옷을 꺼내 입으니 환경도 지키고, 지갑도 지키고, 오랫동안 처박혀 있던 옷에게 세상 구경도 시켜줄 수 있어 일석삼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