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더 전, 친구 K와 떠난 서유럽 여행 중 첫 목적지였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묵은 호텔 이름이 '호텔 카라밧지오 Hotel Caravaggio'였다.
카라밧지오는 밀라노, 로마 등을 옮겨 다니며 생활했지만 피렌체에는 머무른 적이 없는데 어떤 이유로 피렌체에 위치한 호텔에 그의 이름이 붙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글을 쓰면서 혹시 아직도 있진 않겠지...? 하고 찾아봤는데 아직 있다! 역시 역사와 전통의 이탈리아다.
https://maps.app.goo.gl/j68KcqhsM5XXftAC6
그리고 작년 말, 한국에 카라밧지오의 원화들이 왔다.
정확한 전시명은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이다.
휴식 기간에 세운 목표 중 하나가 전시 원 없이 보기였던 데다 알베르토 몬디의 아래 영상을 보고 영업을 당해, 얼른 예약하고 다녀왔다.
https://youtu.be/If_nH5HaN_Y?si=XJAd5t-QvCTBinop
카라밧지오의 키워드는
1. 사실주의 2. 빛과 어둠이다(근데 이제 형사범죄를 곁들인...).
전시 내 57점의 그림 중 카라밧지오의 그림은 10점 내외였지만, 다른 화가들의 작품 역시 이 키워드들에 부합하는 작품들이었다.
전시는 크게
-카라밧지오에게 영향을 준 선배 화가들
-카라밧지오의 작업실 동료들
-카라밧지오의 친구와 적들
-카라밧지오로부터 영향을 받은 후배 화가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간중간 카라밧지오의 작품들이 섞여 있는 구조였다.
후기를 보니 호불호가 갈리는 전시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큐레이션이나 작품 모두 마음에 들었다.
이탈리아 향수 브랜드의 디퓨저를 세팅해 두고 미젤렐레 같은 성가를 틀어두었으며(실제로 종교화가 많았다), 마지막 관에도 성당처럼 촛불을 켜두어, 종교가 없는 사람도 성스러운 느낌, 그리고 종교가 중요했던 바로크 시대에 머무르는 느낌을 받으면서 전시를 즐길 수 있었다.
평일 낮에 가서 집중해서 즐길 수 있었던 것도 한몫한 듯하다.
아쉬운 점은 해설 글자 크기가 작고 배경과 비슷한 색깔이라 잘 보이지 않는 관이 있었던 점 정도였다.
전시회를 쉽게 즐기는 방법 중 하나가 '내가 집에 걸어두고 싶은 그림이 뭔지, 내 개인적 경험이 떠오르는 그림이 뭔지 찾아보는 것'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다.
아래는 그 기준에 따라 마음에 담아 온 작품들이다.
: 사실주의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낀 작품.
주방의 개, 고양이, 식재료, 화롯불 등이 예수와 함께 당당히 그림의 일부로 그려져 있다.
: 카라밧지오의 작품이자 이번 전시의 대표작인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소년의 얼굴은 카라밧지오 자신의 얼굴이다. 카라밧지오의 그림은 주인공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은 것이 많길래 자기애가 강한 줄 알았는데, 한 추기경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후원을 받기 전까지는 가난해서 모델료를 지급할 수 없어서였다고 한다. 이 그림은 그의 동성애적 취향을 가늠케 하는 작품이라는 의견이 있다.
: 역시 당시의 화풍과는 달랐던 사실주의를 잘 보여준 정물화. 그림임에도 과육의 입체감이 사진보다도 선명해서, 과일의 실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거북이(너 1600년대에도 우리 곁에 있었구나?).
: 연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
붉어진 눈시울, 눈물방울, 그리고 손 포즈가 인상적이었다.
: 인물화를 볼 때 옷의 텍스처를 유심히 보는 편인데, 옷감의 재질과 자수가 금방이라도 만져질 듯한 그림이었다.
: 역시 옷감의 텍스처가 인상적이어서 찍어온 그림. 나아가 옷감에 비친 빛과 그 그림자까지. 저런 섬세한 그림을 그리려면 얼마나 고생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 우리 아기의 오동통한 허벅지와 발이 생각나서 찍어온 그림. 몇 개월령을 대상으로 그린 건지 모르겠지만 실제 아기들의 체형과 정말 똑같다!
: 제목이 '성모의 출산'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주의에 따라 아기 예수와 성모를 덜 성스럽게, 보다 현실적으로 그렸다고 하지만, 그래도 실제 출산일의 산모와 아기 상태와는 꽤 차이가 있다.
: 비너스와 큐피드. 이탈리아인가 다른 나라의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봤던 기억이 난다. 큐피드와 비너스가 있는 공간의 장막 뒤로, 늙은 중매쟁이가 젊은 처녀를 노인에게 넘기고 있다. 두 번째 봐도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그림.
: 카라밧지오의 작품 <성 토마스의 의심>. 어디서 본 것 같다했더니 우피치 미술관 소장품이었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성 토마스. 성 토마스의 의심에 가득 찬 얼굴과, 예수의 상처와, 그 상처에 손가락을 굳이 넣어보는 행동이 인상적이었다. 그 어떤 글보다 성 토마스의 성향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 익숙한 얼굴이라고요? 역시 카라밧지오가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한 그림. 활을 쏘아 죽이는 벌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전시 설명에 따르면, 이 그림의 창의적인 점은 화살을 쏜 사형집행인은 정작 그림에 나오지 않고, 사형수만 화살 쪽을 내려다보는 구조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 옷감과 같은 맥락으로, 천사들의 신발 디자인이 특이해서 찍어온 그림.
: 설치가 인상적이었던 마지막 관. 성가를 듣고 촛불을 바라보며 여운을 느끼다가 퇴장할 수 있다.
: 다수의 명예훼손, 폭행, 그리고 마지막에는 살인 범죄까지 저지른 카라밧지오. 1600년대 로마의 법정 문서 내용을 살펴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기존 전시 종료일에서 10일 더 연장하여 4월 6일까지 한다고 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다녀오시길!
개인적으로 앞서 보았던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보다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