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금 들듯이밖에 살지 못하는 사람
변호사라 하면 으레 공부도, 일도, 자산 관리도 똑 부러지게 잘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실제로도 지인 변호사님들 중 그런 분들이 많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모임에 가서 요즘 부동산 시장이 어떻더라, 국장이 어떻더라 할 때마다 알아듣는 척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정리가 되지 않아 알쏭달쏭하다. 리프팅에는 뭐가 좋다더라, 착색에는 뭐가 좋다더라 하는 피부 관리 시술 이름들도 외계어 같기만 하다. 이쯤 되면 내게 정보를 주려는 친구들에게 미안할 정도다.
며칠 전에도 점심을 먹으며 주식 소득으로 월급만큼 번다는 팀원의 이야기를 점심때 듣다가, 나는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았는데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선 청약.
일정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누가 알려줘서 접수해 보아도 대한민국에 내 집 없으면서 아이 하나인 사람들은 어찌나 많은지. 점수가 턱도 없다.
그럼 기존에 건축된 곳을 매수해볼까 싶어도 어디가 오를 거라더라, 어디가 갭투자 성지라더라, 하는 정보도 듣는 잠깐 끄덕끄덕하고는 집에 가서 잊어버린다.
우리 부부는 제일 바보라는, '근로소득 열심히 모아 내가 살고 싶은 집 사려는' 사람들이다.
단일 종목 주식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나, 조금만 잃어도 망연자실하는 나에게 적합한 투자방식은 아닌 것 같았다(국장의 고수인 친정엄마는 나더러 '돌다리 10번 두드려보다 다 놓치는 애'라 한다).
내가 가장 자신 있고 오래 해온 투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는 예적금이다.
과외 등으로 첫 소득이 발생한 20살부터 시작해서 소위 '풍차 돌리기'를 쉰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인플레이션을 못 따라간다, 은행 좋은 일만 시킨다 등 구박을 많이 받았지만 원금을 잃을 위험이 없고(가장 중요), 쏠쏠하게 용돈벌이하는 재미가 있으며, 거의 매달 만기가 돌아오는 여러 상품들의 이자를 합하면 총금액이 내 기준 적진 않다.
그나마 요즘은 이런 나를 안타까워하는 선량한 지인들이 '제발 이거라도 해라'라고 권해주어 달러와 미국 지수에 적립식으로 넣어보고 있다(여기서도 적립을 못 버리는 것이 포인트다).
법원 등 공직, 송무 로펌 변호사, 사내변호사, 공공기관 변호사 등 변호사들이 갈 수 있는 길은 다양하지만, 그 종착지는 개업이다.
그리고 개업 전/후 좋은 영업 수단 중 하나가 블로그 등에 성공사례를 정리해 두는 것이다.
나도 근무하던 로펌에서 선배님들이 방향을 잘 잡아주신 덕분에(그때는 내가 잘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결코 그렇지 않다) 승소나 불송치 경험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좋은 결과를 받아도 잠시 스스로 뿌듯해하고 의뢰인들과 기쁨을 나눈 후에는, 바로 다음 사건에 착수하고 집에 와서는 뻗어서 자느라 성공 사례를 정리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집에 와서 이미 끝난 사건에 대해 또 생각하고 끄적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행위인 글쓰기를 또 일에 써야 하나 싶은 반감이 들기도 했고.
결국 남은 글이라고는 정기적으로 끄적이는 일기와 비정기적으로 끄적이는 브런치글뿐인, 개업과는 멀어지고 있는 변호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오랜 경력(?)의 독서가지만 심각한 편독가다. 에세이, 소설, 인문학 등 소위 '돈 버는데 하등 도움 안 되는' 책만 읽고, 나이가 들면서는 좋아하는 작가들이 정해지고 나서 그분들의 신간만 손꼽아 기다렸다 읽는다.
그나마 한 달에 한 번 하는 독서모임에서 정치, 경제, 과학 등 책을 추천해 주어서 (같은 변호사인데 그분들은 어찌 이렇게 박학다식하단 말인가) 조금씩 접하고 있고, 읽어보니 실제로 흥미롭기는 해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결국 자유 시간에는 다시 내가 원래 읽던 책으로 돌아온다.
그럼에도 이러한 헛똑똑이 같은 나에게 스스로 나름 만족하는 이유는, 돈벌이나 자기 계발과는 전혀 무관한 소소한 기쁨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퇴근한 뒤 아기의 재롱을 보면서 하루의 피로를 씻는 것은 당연하고, 아기가 깨기 전 주말 아침 틈새 자유 시간에 좋아하는 라디오를 틀며, 책을 읽거나 짧은 일기를 쓰고, 건강하면서 맛있기까지 한 음식들의 레시피를 찾아 요리해 보는 것. 잡념이 많은 날에는 요가 수련을 하면서 머리를 비우는 것.
물론 이런 기쁨을 즐기면서 투자까지 야무지게 잘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런 저글링은 아직 나에게는 벅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