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니 시인의 <아마도 아프리카>를 읽고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서 보물이 있는 동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열려라, 참깨!”라고 말해야 한다.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주문(呪文)이 필요하다. 이제니의 시에는 주문들이 가득하다.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페루)라고 주문을 외면 우리는 페루로 간다.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 호랑이”(아마도 아프리카)는 우리를 아프리카로 데려간다. “너의 눈 속 터널을 상상하라 눈을 감고 너의 눈 속 터널을/ 눈을 감고 너의 미간 속을 지나는 둥글고 긴 터널을 상상하라”와 함께 우리는 터널 속으로 간다.
이제니의 시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특징은 어휘의 반복이다. 보통 글을 쓸 때 같은 단어를 쓰는 것은 피해야 한다. 어휘와 표현의 부족 때문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반복에서는 어휘의 빈약이 아닌, 어휘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의 풍부가 느껴진다. “들판은 들판 너머에 있었다/언제나 거의 언제나 처음처럼/ 들판 너머 들판 들판 너머 들판”, “한 발자국 앞의 한 발자국이 흐려질 때/ 뒤이어 내디딘 또다른 한 발자국이 묻는다”와 같은 구절에서는 ‘들판’과 ‘발자국’이 되풀이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그것들은 오히려 반복될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준다.
시인은 단어들에 붙여진 <이름>의 문을 두드린다. 실제에 맞게 이름이 붙여진 것인가, 이름은 실제들을 꼭 붙잡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붙어버린거지.”(페루)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이름들은 그저 예전부터 붙어있었을 뿐 그 어떤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시인은 낱말, 단어들을 ‘고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흰색을 이 검은색을 고아라고 부를 수도 있을까”에서 흰색은 종이요, 검은색은 글자를 가리킨다. “언제나 나는 도착하고 싶었다/도착한 순간조차도 도착하고 싶었다”(단 하나의 이름)는 존재에 가닿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말한다. “너는 단 한번도 똑같은 표정을 지은 적이 없고 나는 너에 대해 말하는 일에 또다시 실패할 것이다. 내가 기록하는 건 이미 사라진 너의 온기. 체온이라는 말에는 어떤 슬픈 온도가 만져진다.”(블랭크 하치)에서 우리는 존재를 기록하려 했지만 실패한 시인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사물들은 한번도 같은 적이 없었는데 우리는 항상 그것들을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이름으로 붙잡으려는 사이에 그것들은 빠져나간다. 우리는 그저 그것들의 온기에 대해 기록하고, 온기를 읽는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나는 그 개의 이름을 모른다. 매듭이 이름인 것처럼 목에 걸려 있다. 나는 그것을 본다.”고 말한다. 그는 이름이라는 매듭을 보는 것은 물론, 가지고 논다. 고무줄 놀이를 하는 것 같다. “완두는 싫다 싫어요/ 완두는 완두 완두하고 울기 때문에// 당신은 완고하다 당신은 완고한 완두콩”(완고한 완두콩), “고백을 하고 만다린 주스/ 달콤 달콤 부풀어오른다/ 달콤 달콤 차고 넘친다”(고백을 하고 만다린 주스)와 같이 그는 이름들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한다. 완고한 당신과 의미 없는 대화를 하는 순간도, 고백을 하고 작별하는 순간도 그래서 조금 유쾌해진다.
영화 <러브픽션>에서 여자 주인공의 연인은 시인이다. 그는 연인에게 ‘사랑해’라는 말은 진부하니까 우리만의 표현을 만들자고 한다. 고민하던 시인은 “나는 너를 방울방울해.”라고 말한다. 그들은 ‘방울방울하다’는 이 세상에 없던 말에 자신들만의 의미를 담아보고, 그것을 발음해본다. 그래서 ‘사랑해’라는 말보다 ‘방울방울해’라고 말할 때 사랑의 마음을 더 잘 전달하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시인도 이 세상에 없는 이름들을 부른다. 분홍 설탕 코끼리, 독일 사탕 개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요롱이, 자니마, 모리씨, 유리코, 뵈뵈, 큐피, 블랭크 하치같은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을 부른다. 그것들은 처음이기에 낯설다. 그렇지만 곧 우리들은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본다. 그 의미를 생각할 때, 그냥 이름을 부를 때와 달리 우리는 그 존재와 더 가까워진다. 시인은 존재의 문을 두드리고, 들여다본다.
이제니의 시를 읽으면 리듬의 흐름이 느껴진다. 우리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도 그렇게 흐른다. “오늘의 밀물과 밀물과 밀물이/ 어제의 밀물과 밀물과 밀물로 번져갈 때”(피로와 파도와) 우리는 저 마다의 방법으로 흐름을 감당한다. “물고기들은 목적 없이 잠들어 있”고, 발 달린 것들은 질주를 하며 “어제의 들판을 가득 메우”(처음의 들판)기도 한다. 그는 “물결을 신은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시간을 신은 여행자와 같이 딱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흐름을 견딜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거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 우리는 우리와 관련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현기증을 느낀다.
“풍경이 뒤로 밀려나기 위해 끝없이 펼쳐지는” 흐름 속에서 우리는 고아가 된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모른 채로. ‘발 없는 새’가 되어 어디에도 앉지 못한 채, 기대어 쉬지 못한 채 흘러흘러 간다. 차라리 놓아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한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발 맞추지 못한다면, 차라리 넘어져 버리고 싶다. “구체성이 결여된 삶에도 사각의 모퉁이는 허용될까. 나는 기대어 쉴 만한 곳이 필요해. 각진 곳이 필요해. 널브러진 채로 몸을 접을 만한 작은 공간이 필요해. 나무로 만든 작은 관이라면 더 좋겠지. 나는 거기 누워 꿈같은 잠을 잘 거야. 잠 같은 꿈을 꿀 거야.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내가 어디로 흘러와 있는지 볼 거야.”(발 없는 새)처럼, 차라리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어디에 와있나 보고 싶다. 오늘의 운세를 찾아보고, 나의 사주를 점쳐보는 행위에는 내가 직접 부딪히고 감당하지 않아도 이루어져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겨있다.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불우한 나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운세는 틀리고 예언은 빗나간다. 예측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무언가가 죽고, 무언가가 태어나고 하는 이 시간에, 우리는 “위안 없는 사물들의 이름으로 시간을 견뎌”낼 뿐이다. 우리의 삶은 ‘실패의 기록부’이자, ‘미완의 노래들’이다.
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살아가는 삶에서도, “격의 없이 약간의 양념만 있다면/ 어떤 단어 어떤 문장으로도 종이를 채울 수 있”다. <곤충 소년이 전진한다>은 그 방법을 알려준다.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들에 그저 “의심 없는 대답”을 하면 된다. 이름에 대해 묻지 않고, 존재의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된다. 그저 있는 이름을 부르며, “율격 없이 절연된 채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반복되고 있는 “앵무의 목소리”이다. 따라하는 것은 정말 쉽다. 오랜 세월 우리는 의심하지 않았다. 답이 있는 것처럼 ‘붉은 색연필’으로 ‘교정’과 ‘수정’을 했다. “무수한 받아쓰기 시험”의 홍수에서 그것을 반복했고, 지금도 그것들은 텔레비전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앵무의 목소리는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친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켜둔 채로” 잠드는 생활을 한다. 다시 아침이 와 일어났을 때에도 텔레비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곤충 소년은 다른 눈을 가지고 있다. 온 세상이 마름모 눈금으로 보인다. 모서리와 모서리는 심장을 찔러댄다. 그런 소년이 나와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나가 되었다. ‘나’는 그와 같이 세상을 보게 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것은 하나가 되었다는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라, 소년의 느끼고 있던 ‘어찌할 수 없음’이 나에게도 옮겨왔기 때문이다. 소년은 “포대자루에 담긴” 것들의 희미한 비애를 느낄 줄 안다. 그래서 말이 없다. 앵무의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하지 못하고, 종종 “중독 난독 비스듬한 자세들”들 보인다. 이제 나와 소년은 같아졌다. 우리는 무수한 받아쓰기 시험을 치르며, 만점을 받지 못했다. “아끼던 종이 위에서” 지우개 가루와 같이 “매일매일 울었”다.
이제 앵무의 붉은 깃털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그래서 ‘나’는 “평생 그 검은 밤의 물그릇을 찾아헤매”게 된다. 의심 없는 질문과 대답을 하지 않고, 자발적인 한 걸음을 내디디려 한다. 방법은 내 속의 목소리들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쓸쓸하지만 씩씩하게, “우리들의 동전은 어디서든 빛날 거라 믿”으며, 곤충 소년과 나는 전진한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제대로 쓸 수 없으며,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시인은 “나는 언제나 틀린 말을 하네. 틀린 말을 하네./나는 언제나 틀린 글을 쓰네. 틀린 글을 쓰네.”(자니마와 모리씨) 라고 말한다. 우리는 돌아오기 위해 떠나고, 틀리기 위해 말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앵무가 아니다. 격 없지 않고, 율격 없지 않다. 보잘 것 없는 삶이지만, 자발적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한번 태어났음에도 또다시 태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 한번 죽었는데도 또다시 죽으려는 사람들. 제대로 태어나지도 제대로 죽지도 못하는 사람들”(발 없는 새)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서 마름모꼴 세상을 보는 우리, 실패하지만 끊임없이 검은 물을 들여다보는 우리는 아름답다. “실패의 기록부와 미완의 노래들은 아름”답다. 시인을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두 번 살지 않을거야/ 완전히 살고 단번에 죽을 거야.”라고. “나는 지구의 회전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나의 여백을 믿는다”(알파카 마음이 흐를 때)라고. “씌어진 문장이 쓰려던 문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피로와 파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달려나가며, “달려 나가는 감각 그대로 밤이 가고 낮이 오는 것을 바라”(초현실의 책받침)볼 것이다. 그리고 결국 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속 걷고, 묻고, 다시 또 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