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읽고
그 날 이후,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쉽게 지나칠 수 없다. 이 기쁨을 너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이 감정에 너도 가슴 벅차 할 수 있을 텐데, 너도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무언가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무언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누군가는 너를 사랑했을 거고, 너도 누군가를 사랑했을 텐데, 너도 이 계절을 느끼고, 다음 계절을 기다리고, 걷고, 뛰고, 앉고, 노래를 부르고, 땀을 흘리고, 누군가의 얼굴을 쓰다듬을 수 있을 텐데, 누군가가 너의 이름을 불렀을 텐데, 더 많은 사람들이 너를 알고, 너를 좋아하고, 너를 싫어하고, 너를 지나칠 수 있었을 텐데. 너는 좀 더 먹고, 떠들고, 웃을 수 있었다, 나처럼. 그런 생각들이 문득문득 나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 날로부터 2년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과방에서 술을 먹고 떠들고 있었다. 과방 한쪽 벽은 이제는 쓰지 않는 사물함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물함을 열어보며, 누구의 것인지 맞추어 보았다. 오 이 사람은 임용고시 공부를 했군, 합격했겠지? 어 나 이 선배 알아. 이 선배 그 학회야. 아 나 만난 적 있어.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 개인 사물함도 있었고, 헌 옷이 나오는 사물함도 있었고, 여러 종류의 피던 담배가 가득한 사물함도 있었다. 그러다 어떤 사물함을 열어본 뒤로 우리는 다른 사물함을 열지 않았다. 교육학 책들이 들어있는 개인 사물함이었다. 책을 꺼내 이름을 확인했는데 책등에 08 전수영, 이라고 쓰여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 선배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사범대 건물 라운지의 이름은 전수영 라운지이다. 그 선배는 2014년 4월 16일, 그 날 죽었다.
9∙11 테러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그 사람들에게는 모두 각자의 인생과 이야기와 사람들이 있었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테러로 아버지가 사망한, 한 아이의 이야기이다. 이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마치 선배의 사물함을 여는 것 같았다. 죽음으로써 처음 나에게 접해졌던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전수영 선배는 처음부터 나에게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지키다 죽은 사람이었으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9∙11 테러로 무너진 빌딩이었다. 그러나 선배에게도 삶이 있었고, 빌딩에도 수많은 삶과 이야기가 있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죽은 사람의 애도하는 한 방식이다.
세 아이의 어머니, 대학 2학년생, 양키스 팬, 변호사, 형제, 증권거래인, 주말 마술사, 입심 좋은 재담꾼, 자매, 박애주의자, 둘째 아들, 개를 좋아하는 사람, 수위, 외동아이, 기업가, 웨이트리스, 손자 열넷을 둔 할아버지, 공인 간호사, 회계사, 인턴, 재즈 색소폰 연주자, 다정한 삼촌, 재향 군인, 늦은 밤에만 시를 쓰는 시인, 자매, 유리창 닦이, 스크래블 게이머, 자원봉사 한 소방수, 아버지, 아버지, 엘리베이터 수리공, 와인 애호가, 총무팀장, 비서, 요리사, 금융업자, 부사장, 탐조가, 아버지, 접시닦이, 베트남 참전병, 새엄마, 독서광, 외동아이, 뛰어난 체스 선수, 축구 코치, 형제, 애널리스트, 호텔 지배인, 태권도 유단자, CEO, 브릿지 게임 파트너, 건축가, 배관공, 홍보 이사, 아버지, 재택 예술가, 도시 계획가, 신혼부부, 투자 은행가, 주방장, 전기 기술자, 그날 아침에 감기에 걸려서 결근을 하겠다고 전화하려 했던 새아빠……. 그러던 어느 날, 토머스 셸이란 이름을 보았단다.
토머스가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부고란에서 발견하는 이 장면은, 나에게 한 영상을 떠올리게 했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는 영상이다. 너희에게도 삶이 있었지, 이야기가 있었지, 무엇보다 너희에겐 미래가 있었지. 이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영상도 하나의 애도다. 죽음을 기리는 것은 삶을 기억하는 것. 그 밖의 다른 이야기들은 여기서는 묻어두도록 하겠다.
주인공 오스카와 아버지 토머스는 우주에 대해 얘기한다. 오스카도 우주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할머니도 편지에 우주에 대해 쓴다. 스티븐 호킹도 오스카에게 우주에 대해 답장한다. 살아있을 때 토머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우주와는 다른 어떤 종류의 우주도 있을 수는 있지. 하지만 생겨난 것은 지금의 우주야." 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인지, 무신론자는 대답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많은 우주 중 지금의 우주가 생겨났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면 그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는 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긍정하게 한다. 그래, 나는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살아있는 거야,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왜 우주는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선택했는가? 왜 그것은 사라져야만 했는가?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게 했던 우주의 선택에 대한 믿음은 타인의 부재까지 긍정해야 하는 잔인한 상황을 만든다.
이 소설에는 수많은 부재들이 있다. 전쟁 때 드레스덴에 일어난 공습으로 애나가 죽는다. 애나는 토머스의 연인이자, 오스카 할머니의 언니다. 토머스는 그때부터 언어를 잃어 간다. 애나는 미국으로 떠나, 원래부터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행동하는 데에 열중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다시 만나고, 결혼한다. 그들은 함께 살면서 수많은 규칙들을 만드는데, 그것은 그들의 관계 사이에서 애나를 떠올리지 않기 위한, 그리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으로 보인다. 아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 토머스는 그녀를 떠난다. 그에게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은 그것을 언젠가는 잃을 것이라는 예고다. 그는 애나를 잃어 보았고, 평생을 그녀를 생각하며 살았다. 그녀를 떠날 수 없었다. 그녀에 대한 예의인지, 아니면 또다시 무언가를 잃는다는 두려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녀만큼 소중한 것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그곳을 떠난다. 아내는 혼자 남겨지고, 아들의 이름을 토머스라고 짓는다. 그 아들은 아버지를 닮았다. 아들은 시간이 지나 아내를 맞고 다시 자신을 닮은 아들 오스카를 낳는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 그들 곁을 떠난다.
오스카는 계속 답을 찾아다닌다. 아빠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남겨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알기 위해 그는 화병에서 우연히 발견한 쪽지에 적힌 <Black>을 찾아다닌다. 그 쪽지와 함께 발견된 열쇠에 맞는 자물쇠를 Black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수많은 Black들을 만난다. Black은 흔한 성으로, 같은 날 가족과 지인을 잃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스카는 그들을 만나 그들에게 질문한다. 그러나 답을 얻지 못한다. 답은 누가 알고 있는가? 신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답해줄 수 있는가?
오스카는 스티븐 호킹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내는데, 결국은 그의 답장을 받아낸다. 호킹의 답장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광대무변한 우주 대부분이 암흑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얘기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우리가 결코 볼 수도, 들을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맛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들이 깨지기 쉬운 균형을 좌우합니다. 그것이 삶 자체를 좌우합니다. 무엇이 진짜일까요? 무엇이 진짜가 아닐까요? 어쩌면 이런 질문은 하지 말아야 할, 옳지 않은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삶을 좌우할까요?" 삶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삶과 죽음까지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우주의 힘인가? 우리는 우주가 존재를 허락하면 존재하고, 죽이면 죽고, 그 때문에 슬퍼하고, 슬퍼하고, 슬퍼하고, 슬퍼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우리를 좌우하는 모든 것인가? 정말 진정으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토머스는 아들의 존재를 알았을 때 맨해튼을 떠났다. 그러다 부고란에서 아들의 이름을 발견하고 나서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온다. 왜 이곳에 왔냐는 질문에 그는 "다시 살아보기 위하여"라고 답한다. 그의 삶을 관통해서 폐허로 만들어 버렸던 애나의 죽음을, 아들 토머스의 죽음으로 딛고 일어선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의 아내는 반대로, 언니의 죽음, 남편의 떠남, 아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살았으며, 오스카의 존재로 비로소 삶을 긍정하게 된다. 그녀는 오스카에게 이렇게 쓴다. "너를 볼 때면, 내 삶이 이해가 되었어. 나쁜 일조차도 다 이해할 수 있었어. 너란 존재를 이 세상에 있게 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이 다 필요했던 거야. 세상에. 네 노래들. 내 부모님의 삶도 이해가 되었어. 조부모님의 삶도. 언니의 삶까지도." 어떤 존재들은 그 전의 아픔까지도 긍정할 수 있게 한다. 그런 존재가 언제든 나타나길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알았을 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화장실에 가야 했어. 일어나고 싶지 않았단다. 내 배설물 속에 널브러져 있고 싶었어. 나는 그래야 마땅해. 내 오물 속에서 뒹굴고 싶었어. 하지만 일어나서 화장실로 갔단다. 그게 바로 나야." 아들의 사고를 알고 나서도 그녀는 화장실에 가서 토한다. '그게 바로 나'라는 그녀의 고백은 타인의 수많은 죽음에도, 수많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는 우리의 가슴을 때린다. 몇 번 반복되는 그 고백에 독자도 죄책감으로 엉망이 된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책을 읽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
할머니가 쓴 편지 뒤에 이어지는 부분은 이렇다. "하지만 난 진실을 알고 있었지. 그래서 이토록 슬픈 거야. 지금 이 순간 이전의 모든 순간이 바로 이 순간에 달려 있어. 전 세계 역사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어." 우주는 모든 역사를 긍정하게 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부정하게 하기도 한다. 다음 순간 때문에 모든 것이 좋아지기도, 모든 것이 나빠지기도 한다. 진실은, 그것은 우주가 아니라 모두 우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살아있는 인간은 강하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무력하지만, 살아있다면 다시 삶의 의미와 존재의 필요를 찾을 수 있다.
역사를 통째로 긍정하거나 부정하게 하는 존재, 그렇게 우리를 뒤흔드는 존재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게 된다. 앞으로가 나쁠지 좋을지 예측할 수 없지만 당신이 살아있다면 나는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남들이 보는 데서는 울지 않아도 되고, 토하고 싶을 때 화장실로 달려가도 되고, 울다 지쳐 쓰러졌더라도 일어나서 음식을 입에 넣어도 된다고. 그리고 언젠간 다시 우주를 긍정하게 되길 바란다고. 이기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강한 것이 바로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