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월의개미 Feb 28. 2019

어버이날

엄마와 나 사이 높임법 논쟁은 열다섯 이후론 잠잠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한테 존댓말을 쓰라던 엄마는 이제 몸집은 자기만하며 말투는 자기보다 더 공격적인 열다섯의 딸을 보고 존댓말 요구를 포기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전쟁이 끝난 줄 안 건 내 착각이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스물다섯 어버이날, 엄마는 왜 아직도(?) 존댓말을 안 쓰냐고 화를 냈다. 잠깐 고성 지르기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아직도 엄마가 내게 ‘존경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넌 왜 날 안 존경해?” 몇 번이고 묻던 젊은 엄마를 보며 어렸을 때 깨달았다. 마음은 절대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엄마가 그렇게 물을수록 청소년 오경민은 ‘엄마를 존경하기’로부터 멀어졌다. 존경은 저렇게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하는 건데...엄만 그것도 몰라! 정말 귀찮아! 생각했다. 이후 봤던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당신은 왜 날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은 단 한번도 사랑받지 못했다. 마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 바라면 바랄수록 달아나는 것, 그렇게 배웠다.


스스로 피부는 웜톤 마음은 쿨톤인 인간이라 여겨왔다. 열살 이후 어느 그룹에서나 적당히 잘 지냈던 난 적당히 만족하는 법부터 배워서 상대방 마음을 얻을 노력을 해본 적이 없다. 보통 나는 상대방으로부터 바라지 않았고, 상대방은 나로부터 무언갈 바랐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절대 주지 않았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는 것만큼 무용하고 비참한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람은 결국 누군가의 마음을 원하게 되는 모양이다.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날 좋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처세술을 익히고 말도 안 되는 연애조언을 구했던 것일까? <남녀탐구생활>의 인기는 정말 성우가 아니라 그 내용 때문이었나?


다시 엄마와 존경 문제로 돌아가자. 열다섯의 나는 엄마를 좀 무서워하고 존경하진 않았다. 이제 나는 엄마를 두려워하진 않지만 존경한다. 엄마의 따뜻함과 따뜻함을 표현하는 방식을. 꿋꿋함과 사랑스러움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엄마의 부재다.


어버이날 사건이 급히 진화된 건 내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엄마, 난 내가 존댓말을 쓰는 대상을 존경해본 적 없어. 내가 엄마를 존경할 수 있는 건 엄마가 (타의에 의해서였지만) 그런 권위를 내려놓는 사람이라서야. 그리고 엄마는 몰랐겠지만 이미 엄마를 존경하고 있어.


엄마가 나로부터 존경을 포기했을 때 오히려 난 엄마를 존경하게 됐다. 짜증난다. 마음은 결국 원하는 이의 몫이 아니라 마음 주인만의 몫인 걸까? ‘원하는 마음을 얻기’에 방법 따윈 없는 걸까?

매거진의 이전글 동굴 사는 사람 만난 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