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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개미 Apr 17. 2019

쫑쫑씨와 마법의 성

아빠에 대해선 쓰기가 어려웠다. 아빠는 내 안에서 좌표가 가장 다이나믹하게 움직인 사람이다. 존경했다가 실망했고, 안쓰러웠다가도 무서워지곤 했으며, 보살펴주고 싶다가도 곁에 있는 게 끔찍해져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어렸을 땐 무조건 멋지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와 찍은 스티커사진을 다이어리 앞에 붙여두었다. 그의 양 손을 마주 잡고 다리를 타고 올라서 한 바퀴 도는 재주를 하루에 다섯 번씩 했다. 주말엔 그를 졸라서 마법의 성이란 보드게임을 했다. 그치만 다 커서는 아빠 때문에 많이 울었다. 말 그대로 진절머리 날 때도 많았다. 아빠 때문에 울면서 하루종일 글을 쓴 날도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몇 달이 지나고나서는 글을 썼다는 사실조차 까먹기도 했다. 나쁜 기억이어서 스스로 묻어버린 것 같다. 노트북 파일을 정리하다 그때 쓴 글을 발견했을 때에야 그때 내가 많이 힘들었구나 알 수 있었다.


내 유일한 가출은 스물네 살 때였으며 아빠, 그리고 그 상황에서 아빠가 아닌 나를 탓하는 엄마 때문이었다. 나는 저 사람과 같은 집에 있을 수 없다면서 집에서 가장 큰 우산을 빼들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비가 정말 마구 쏟아지는 밤이었다. 자취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어차피 통화가 됐어도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만 같이 비가 억수로 왔다. 갈 곳도 없는데 비는 계속 오고 춥고 배고프고 졸리고 무엇보다 분해서 눈이랑 볼 주변이 욱신거렸다. 며칠 동안 아빠가 없을 때만 집에 들어갔다. 아빠는 나한테 사과하려고 매일 나를 기다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 바닥에 앉은 뒷모습이 보였는데 그의 오래된 근육형 거북목을 보니 습관처럼 등을 두드리며 허리 좀 펴, 말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말을 건넬 용기가 아직 나지 않았으므로 딸 왔어, 하는 아빠를 무시한 채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내가 좋아하는 초밥을 사다 놓고 소주 뚜껑을 열지 않은 채 티비를 봤다.


그 일 전후로 아빠를 꽤 오래 많이 미워했다. 술만 먹으면 아빠를 때리면서 울었고 아빠가 없을 땐 아빠를 욕했다. 그럼에도, 진부하게도, 이 사람은 나를 지독히도 사랑한다는 것이 느껴져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어떻게 화해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아빠는 모르는 척 꾸준히 나를 실어날랐다. 때론 자취방으로, 때론 시험장으로. 처음엔 멋쩍어서 안 탔는데 나중엔 태생적인 지각 인간이라 어쩔 수 없이 타기도 했고 나한테 잘못한 것도 있는데 좀 얻어타자 싶기도 했다. 얘기를 나눌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고, 그랬다. 나는 이 사람이 정말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꾸준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같기도 하다. 결국엔 다시 내가 아빠는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니까. 나는 다시 전화번호부에 아빠를 ‘쫑쫑씨’라고 저장해두었다.


아빠는 아침에 내 몫으로 영양제 네 알과 홍삼을 꺼내놓는다. 하루치 영양제를 일주일에 걸쳐 나눠 먹는 나를 조용히 기다려준다. 원래 이 문장을 쓰고 싶어서 이 글을 시작했는데 시작도 중간도 이상해서 올려도 될 지 모르겠다. 아침에 생각해보고 지우던가 해야지. 아빠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다시 써보려고 한다. 아빠는 내가 울적해보일 때는 초밥을 사온다. 아빠는 주말에 아침 먹을 거냐고 물어보면서 조심히 나를 깨운다. 뭐 그런 얘기들로. 아빠는 먼 길을 돌아돌아서 다시 이곳으로 왔다. 나는 그 궤적이 어렸을 때 아빠와 하던 마법의 성 게임 지도 같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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