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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개미 Sep 26. 2016

임산부 배려에는 임산부가 없다

 "아이를 때리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맞은 아이는 나중에 자신의 아이를 때리기 때문이다. 가정 폭력은 대물림되니까 가정 폭력을 근절하자." 여기에서 빠진 것은? 바로 '부모에게 맞는 아이'다. 분명히 '아이를 때리지 말자'는 좋은 의도를 담고 있는 말인데, 아이가 빠지니 공허하고 잔인하게 들릴 뿐이다. "맞으면 아프니까 때리면 안 된다. 맞는 것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이기 때문에 가정 폭력은 사라져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 한 후에야 폭력의 대물림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폭력의 재생산은 당사자의 고통 뒤에 일어날 일이다.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조명되어야 할 것은 당사자의 고통과 피해다.


 우리는 이같이 당사자 없는 논의에 매우 익숙하다. 최근 지하철 안에서도 '당사자 없는 당사자 배려'가 눈에 띈다. 당사자가 고의로 지워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임산부 배려석을 한 번쯤 봤을 것이다. 거기엔 이렇게 써있다.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 그 임산부 배려석을 홍보하는 지하철 광고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는 나라의 미래입니다. 임산부를 배려해주세요!" 여기에 없는 것은? 바로 '임산부'이다. 임산부를 배려해야 하는 것은 배 속의 아이 때문인가? 아니다. 임산부 본인 때문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는 그 이후의 이야기다.


임산부 배려석 문구
임산부 배려석 광고 - 9호선


 위 문구들에서 모두 주체로서의 임산부가 생략되어있다. 임산부는 본인으로서가 아니라 아이를 낳는, 나라의 미래와 직결되는(?) 출산율을 높이는 존재로 전락한다. 임산부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를 낳는 '것'이 된다. 그러나 임산부가 배려받아야 하는 이유는 아이를 곧 낳을 것이기 때문에, 아이가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이 아니다. 먼저 생각되어야 할 대상은 아이보다 임산부다. 임산부를 배려하는 이유는 노약자를 배려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남들보다 서있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몸이 무겁고, 서있는 것이 남들보다 더 버겁기 때문이다.


 얼마 전 보건복지부에서 만든 저출산 공익광고가 SNS에서 '잘 만들었다', '귀엽다'는 반응을 얻었다. 광고를 보자. 아이가 지하철에 타니까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는 학생이 벌떡 일어나 아이를 자리에 앉힌다. 아이가 카트를 밀고 트렁크를 열자 지나가던 남자가 짐을 차에 실어준다. 아이가 일하고 있자 상사가 와서 일찍 퇴근하라고 말한다. "오늘도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가 말한다. 그리고 아이는 엄마로 바뀐다. '엄마가 되는 기쁨, 모두의 배려에서 시작됩니다.'라는 문구로 광고는 마무리된다. 긍정적인 반응을 얻은 이 광고에서도 엄마는 태어날 아이와 동일시 된다. 엄마는 곧 아이이다. 임산부는 임산부 본인으로서가 아니라, 곧 태어날 아이를 품었기 때문에 배려받는다.


 그러나 다시, 임산부는 아이를 낳는 수단이나 출산율을 높이는 도구가 아니다. 임산부 배려에서는 임산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보건복지부 저출산 공익광고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임신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본 적 있다. 제목은 '임산부 배려석에는 배려가 없다'라는 식이었다. 사람들은 "임산부가 오면 비켜주겠다."며 앉아있었다. 초기 임산부는 임산부가 아닌 사람과 구별하기 힘들뿐더러, 임산부가 와도 비켜주는 경우가 드물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 임산부석에는 '배려'가 없다. 또한, 그곳에는 '배려'도 없지만, '임산부'도 없다. 그곳에는 그저 저출산에 대한 국가적 우려, 임산부가 아님에도 앉는 사람들의 무신경함과 뻔뻔함, 자신의 자리인 것 같은데도 배려받지 못하는 임산부의 곤란함, 그리고 채워지지 않은 당사자의 빈칸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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