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으는 돼지 Apr 11. 2020

딱 오늘 하루치를 살아가게 해주는 힘

날이 추워지자 출근하는 일이 더 힘들어졌다. 얇은 유니폼에 스타킹 하나만 신은 채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거리를 뚫고 출근하면, 비행하기 전부터 온몸이 굳어버렸다. 아침에 눈이라도 오면 나는 그날 비행이 결항되길 간절히도 바랐다. 결항되면 승객의 컴플레인은 극에 달할 것이고, 그 컴플레인을 받아내야 할 예약 관리팀과 공항 운송 직원은 죽을 맛이겠지만, 내 몸 편한 게 우선인 나는 내심 결항되길 바라곤 했다. 항공사 잘못이 아닌 천재지변으로 결항되는 거라면 뭐... 별 수 없잖은가. 하지만 비행기는 매번 잘만 떴고, 나는 추위에 덜덜 떨며 캐리어를 끌었다.


어제는 제주도를 찍고 오는 비행을 했다. 날씨를 검색해보니 한파와 폭설로 제주도 일부 지역에서 우편배달이 중단됐다는 기사가 보였다. 비행기가 결항 되었다는 기사는 없었다. 회사로부터도 아무 연락이 없기에 나는 허망한 마음으로 출근 준비나 했다.
비행기는 무사히 뜨고 내렸고, 나는 저녁 7시 30분쯤 김포공항 국내선 터미널에서 퇴근했다. 같이 비행한 기장님과 승무원에게 연말 인사를 나누고, 때맞춰 들어오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폭신하고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귤이나 까먹으며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마저 읽을 생각이었다. 지하철을 막 타려는데 재언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별생각 없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30일 연말 저녁이니 그저 안부 인사를 묻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어~ 언니! 잘 지내고 있지?
날돼. 어디니..?
나 지금 막 착륙해서 김포공항인데. 왜?
언니 이 연말에.. 소개팅하려고 강남에 나왔는데...
어. 근데 왜. 목소리가 왜 그래. 사람이 별로야?
아니, 별로고 자시고 사람을 봐야 무슨 말을 하지. 지금 30분 넘게 기다리고 있는데, 남자가 아예 연락도 없이 아직까지 나오지를 않았어...
어머, 언니... 뭐 그런 사람이 다 있어? 연락 한 번 해봐.
연말에 소개팅이라고 한껏 꾸미고 나왔는데. 언니는 연말까지 어쩜 이렇니? 2020년에도 노처녀 예약이다, 예약이야!!!
에이, 언니. 뭘 또 소개팅 한 번 가지고 내년에도 노처녀라고 점을 쳐!
어휴... 나는 왜 이렇니...
언니! 그럼...

나는 잠깐이지만 갈등했다. 내 안락한 침대와 그 위에 놓인 얼마 전에 새로 산 푹신한 쿠션과 냉장고에서 내가 야무지게 까주길 기다리고 있을 귤 한 박스가 눈에 어른거렸다. 그래도 내가 애정하는 재언니가 소개남에게 바람맞아 식당에서 한 시간 가까이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그냥 집으로 가는 짓은 도저히 동생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언니! 그럼... 내가 갈게. 강남 이랬지? 나랑 같이 저녁 먹자.
어머, 날돼야! 이 의리녀!!!
언니의 목소리가 돌연 밝아졌다.
김포공항에서 9호선 급행 타고 가면 신논현까지 금방 가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럼.
날돼! 사랑해!!!
어, 언니. 나도...

마침 개인용 패딩을 캐리어에 욱여넣어 챙겨 나왔기에 꺼내 입었다. 목까지 지퍼를 올려 채우니 유니폼을 완벽히 가릴 수 있었다. 언니는 소개남이 예약한 식당에서 계속 있기에는 쪽팔리다며 족발집으로 장소를 옮기겠다고 카톡을 보내왔다. 소개남에게 연락해보니 소개남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인 줄 알았다고 한다(이런 우라질 놈, 너 때문에 내가 이 추위에 비행한 것도 모자라 강남까지 간다!). 나는 빨리 가겠다며, 족발에 막국수나 마구 먹자고 언니를 다독이는 카톡을 보냈다.

신논현역에 내려 족발집으로 들어서자 예쁘게 단장한 재언니가 한눈에 보였다. 추운 날씨임에도 멋 내느라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언니는 내가 앉기 무섭게 소개남을 저주하고 욕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지, 그렇지 하고 맞장구를 쳐주며 상추 위에 족발과 마늘과 쌈장을 듬뿍 얹어 먹었다. 허기진 속이 채워지자 강남까지 올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언니의 한탄은 오늘 등장하지 않은 소개남에서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언니가 겪은 역대급 최악의 소개팅 순으로 쭈욱 쭉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이 레퍼토리를 이미 여러 번 들어 꿰뚫고 있다.

원래 재언니와 한언니, 혜언니와 나 이렇게 넷이서 친한데, 혜언니가 작년에 결혼을 했다. 언니들은 모두 37살이고, 내년이면 38살이 된다. 언니들은 무수한 소개팅의 역사를 갖고 있다.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이면 서로 누가 더 최악의 소개팅을 했는지 대결을 펼쳤다. 애프터를 거절하자 밥값이나 내라며 계좌번호를 보낸 남자, 지디 못지않은 패션 센스로 같이 걷는 일조차 부담이던 남자, 웬만한 여자보다 애교가 많아 말끝마다 ㅇ을 붙이고 윙크를 해대던 남자,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과거 연애사를 줄줄이 읊는 남자 등등. 내가 언니들의 시트콤 같은 소개팅 이야기를 듣고 기겁을 하면 결혼한 혜언니가 옆에서 말했다.

야! 너네~~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 나는 같이 파스타 먹는데 여드름이 점점 부풀어 올라서 터진 남자도 있었어. 내가 먹다가 그 남자 여드름 피까지 닦아줬다~! 야, 이 정도 고난은 겪어봐야 결혼하는 거란다. 너넨 아직 멀었다, 멀었어.
그럼 37살 노처녀 언니들은 더욱더 울상이 되었다. 나는 언니들에게 아니라고, 다 인연이 아니었던 거라고 하나 마나 한 상투적인 위로나 던질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고 싶다며 울먹이는 언니들이 귀여웠다.
재언니는 최악의 소개팅 에피소드가 하나 더 추가됐다고 말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좋네, 라고 말하며 언니에게 마지막 남은 족발 한 점을 건네주었다.
언니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트에 들러 아침에 먹을 죽이랑 샐러드를 샀다.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나보다 조금 앞서 걷는 연인의 대화가 들렸다.

오늘 생각보다 덜 춥다, 그치. 응, 근데 다음 주부터 다시 한파래. 코트 입지 말고 패딩 입고 나가. 응. 자기도 아침에 생강차 좀 텀블러에 담아서 가지고 나가라니까. 응. 응.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였다. 날씨가 춥다거나, 아침이나 저녁 식사를 챙기는 그 별것도 아닌 대화야말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자들의 특권이었다.


진지하고 깊이 있는 대화도 좋지만, 딱 오늘 하루치를 살아가게 해주는 힘은, 내 일상을 궁금해하고 걱정하는 사람의 한 마디. 먹고살기 바빠 제 코가 석자인 나날에서 서로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나름 살만하다는 생각. 살면서 쌓이는 스트레스와 긴장을 풀어주는 건 뭔가 대단한 게 아니라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


나는 멈춰 서서 앞서 걷는 연인을 먼저 보내고 재언니에게 카톡을 했다. 언니의 일상을 함께하고 나눌만한 사람이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달달한 차를 마실 수 있는 기프티콘도 보냈다. 언니, 다음 주부터 다시 한파라네. 코트 입지 말고 패딩 입고 다녀. 따뜻한 차도 챙겨마시고.
아마 당분간은 내가 언니 일상을 챙겨야 할 터이지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승무원들의 뭔가 다른 결혼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