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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 돼지 Apr 21. 2020

유머러스한 승무원 되기 프로젝트

미국 휴스턴으로 비행을 다녀왔어요. 이번 스테이에서는 유독 미국인 특유의 유머와 위트가 찰지게 다가오는 순간이 많았죠. 예를 들면 이런 상황들이요.

이른 아침 저는 호텔 헬스장에서 요가하고 나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잡아탔어요. 엘리베이터 안에는 이미 한 미국인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지요. 문이 스르르 닫히고 정적이 흐르는가 싶었는데 그 미국인이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I hope it's not a gin~!"


저는 이 사람이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어리둥절했죠. 그러자 그는 제가 손에 들고 있는 물통을 가리키며 다시 똑같이 말했어요. "I hope it's not a gin~!?!" 아하... 칵테일 진토닉 할 때, 그 진이 아니길 바란다는 말이었어요. 제가 아침부터 술 마시는 거 아니냐는, 뭐 그런 미국식 농담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이 낯선 미국인에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어이쿠, 걸려버렸네~ 하고 어설프게 맞장구를 쳐주었죠.


그는 아주 호탕하게 웃어 젖히고는 좋은 하루 보내라는 말을 남기며 엘리베이터에서 유유히 내렸어요. 저는 그가 내린 후에도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요. 생판 모르는 한국인 남녀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싶었어요. 한국의 어느 한 빌딩 엘리베이터에 함께 탑승한 남자가 여자에게 이런 농을 던진다면, 여자는 지레 겁을 먹거나 상대조차 안 할 거예요. 제가 허허 웃으며 장난을 받아칠 수 있던 것도, 어쨌거나 그곳은 낯선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말을 잘 건네는 미국이었잖아요. 방으로 돌아와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데, 진이 아니냐는 농담이 생각나 다시 헛웃음이 나더라고요. 이런 게 미국식 유머 감각이구나 싶기도 했죠.


아침부터 운동을 했으니 배도 채울 겸 호텔 근처 쇼핑몰에 있는 쉑쉑버거로 향했어요. 추리한 운동복을 벗어던지고 하늘하늘한 쉬폰 원피스를 입고 나갔더랬죠. 가게 앞 늘어진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제 뒤에 있는 백인 여자가 난데없이 말을 걸었어요.

"Oh~ my~~ god~~~! Honey, I love your dress! Where did you buy it?"

저는 조금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배시시 웃었어요.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샀다고 말했죠. 백인 여자는 자기도 너무 사고 싶은데 안타깝다고 했어요. 쉑쉑버거를 다 먹고 옷 구경이나 하려고 매장에 들어갔는데 판매 점원이 똑같이 말을 하더라고요.

"Oh, darling...! Your dress is so~~ beautiful!"

그러고 보니 저는 미국에서 honey, darling, sweetheart 같은 이름으로 처음 불려봤어요. 사교성이 좋은 편인 저도 미국인은 절대 못 따라가겠더군요. 다짜고짜 허니~ 달링~~ 이라니요. 그래도 세상 다정하게 저를 부르며 원피스가 이쁘다고 칭찬까지 해주니 기분은 나름 좋았어요.


아이쇼핑까지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호텔 앞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중년의 백인 여성이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어요.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저와 건너편에 있는 여자밖에 없었죠. 파란불이 되어 건너려고 발걸음을 가볍게 뗐어요. 건너편에서 휠체어를 탄 여자도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죠. 전동식 휠체어가 아니어서 부지런히 팔과 손을 놀리더라고요. 단단하게 자리잡은 팔근육을 슬쩍 훔쳐보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 쪽에서 먼저 환하게 웃어 보이는 거 아니겠어요?


"Hi~? It's very wonderful weather today~! Enjoy it!"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열심히 바퀴를 굴리며 저를 지나쳤어요. 저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인사를 받고 "날씨 정말 좋다!", 또는 "너도 좋은 하루 보내!"라고 할지 말지 멈칫하다 그녀를 놓쳐버리고 말았어요. 정말 이런 일은 순간이더라고요. 누군가에게 먼저 인사를 던지는 타이밍도 순간, 유머 감각을 뽐낼 수 있는 타이밍도 순간. 미국인들은 그 순간순간을 잘도 포착해서 절묘한 타이밍에 활용할 줄 아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휴스턴에서 미국인의 유머와 여유를 맛본 저는 돌아가는 비행에서 그것들을 십분 적용해보기로 마음 먹었어요. 한 마디로 유머러스한 승무원으로 비행하자고 결심한 거죠!


탑승 시간이 끝나가는데 승객 한 명이 오지 않았어요. 저는 마침 비행기 문 앞에서 승객들을 맞이하는 담당 승무원이기에 문 앞에 서서 나타나지 않는 승객을 기다리고 있었죠. 마침내 마지막으로 탑승할 승객이 탑승교 끝에서부터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어요. 갑자기 괜한 장난기가 발동했죠. 저는 마지막 승객에게 인상을 조금 찡그리고는 왼쪽 팔목에 찬 손목시계를 오른손 검지로 탁!탁! 치는 시늉을 해 보였어요. 당신 때문에 우리 지금 늦었다! 같은 사인을 보낸 거죠. 그러자 승객이 더 사색이 되어 허겁지겁 달려오더라고요. 저는 바로 표정을 풀고 장난이라며(조킹 조킹~) 천천히 걸어오라고 외쳤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한 수 위더라고요. 승객은 자기도 늦은 게 멋쩍어서 뛰어오는 척이라도 했다고 말했어요. 승객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제가 던진 농담에 맞장구를 쳤죠. 우리는 함께 한바탕 웃었어요. 승객은 서둘러 자리를 찾아가 앉았고 비행기는 다행히 제시간에 이륙할 수 있었어요.  


비행 중에는 한 승객이 조그만 봉지에 담긴 땅콩 과자를 더 먹고 싶어 했는데요. 평소에는 한두 봉지씩 건네면서 맛있게 드시라고 간단히 말하고는 돌아섰거든요. 하지만 이번 비행에서 제 컨셉은 유머러스한 승무원이니까, 과자를 네다섯 봉지씩 집어서 건넸어요. 승객은 뭘 이렇게 많이 주냐는 눈치로 저를 올려다보았고, 저는 그런 승객에게 무슨 비밀인 것처럼 속삭이며 말했어요.

"많이 드세요. 이따 더 가져다드릴게요. 땅콩 회항만 안 하면 되잖아요? 비행기에 땅콩이 아주 넘쳐나요 넘쳐나."

제 말에 승객은 킥킥 웃으면서 과자 더미를 기꺼이 받아들었죠.


아, 제가 너무 좋아한 승객도 있는데요.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이었는데, 식사 서비스 내내 음료로 물만 주문하더라고요. 미국 노선에서 첫 번째 기내식 서비스는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 정식, 디저트, 따뜻한 차나 커피 순으로 코스 요리가 진행되어요. 대부분 승객이 하늘 위 만찬을 만끽하기 위해 코스마다 어울리는 음료를 주문해 즐기기도 하고, 조금 더 유별난 승객은 와인을 종류별로 깡그리 주문해 테이블 위에 죽 늘어놓고 비교하며 마시기도 하죠.


와인부터 시작해 위스키, 사케, 소주, 매실주, 칵테일 등 다양한 종류의 술을 즐기는 승객들의 모습 이면에는 승객마다 어떤 술을 마시고 있는지 메모하고 외우는 승무원들이 있어요. 승객이 같은 걸로 한 잔 더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게 무엇인지 다시 한번 여쭤보는 번거로움을 승객에게 안기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혹은 승객 잔에 담긴 술이 바닥나기 전에 승무원이 먼저 알아서 제공하는, 눈치 빠른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죠.


메모하고 외우고 눈치까지 보며 알맞은 타이밍에 식사와 음료를 정신없이 서비스하는 가운데 시종일관 물만 마시는 승객이 참 고마웠죠. 저는 고마운 마음에 괜히 뭐라도 더 드리고 싶어 서비스 막바지에 물을 따르며 필요한 건 없는지 물었어요. 승객은 그냥 물 한 잔씩만 주면 된다고 소탈하게 대답했어요. 요구가 까다롭지도 않은데 저에게 친절하기까지 한 승객에게 애정이 마구 샘솟았지요. 정~말 고맙다고 말하니 승객은 자기가 극진한 서비스를 받으니 오히려 더 고맙다고 했어요. 저는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더 솔직하게 말했죠. 승객이 물만 마신 덕분에 실은 오늘 서비스하기가 한결 수월했다고 말이에요. 승객은 크게 웃으며 물을 마셨을 뿐인데 승무원에게도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다고 했어요. 저도 승객을 따라 웃었죠.


이날 승객들에게 가벼운 농을 던지면서 서비스하니 제가 더 신이 나고 재미져서 가뿐하게 비행을 마칠 수 있었어요. 나의 일터를 풍요롭게 만드는 일이 바로 거기에 있더라고요. 유머로 양념을 치자 무료했던 일도 돌연 활기를 띠지 뭐예요. 소소한 농담과 털털한 웃음이 오히려 일하는 순간에 전념할 수도 있게 해주고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승무원 면접을 볼 때가 생각이 나요. 면접이 조금 막힌다 싶으면 에라이, 면접관을 웃기고나 나오자! 하는 배짱으로 면접에 임했거든요. 일본항공사 ANA의 최종 면접도 무시무시했어요. 면접관이 총 일곱 명인데 반해 면접자는 딱 한 명만 들어가서 30분간 보는 면접이었는데요. 면접관으로는 일본인 셋, 싱가포르인 셋, 영국인 한 명이 있었어요. 삼 개국의 면접관이 한자리에 모인 거죠. 일대일 영어도 힘든데... 칠대일 영어 면접에 국적까지 다양하니 영어 실력이 부족한 저는 손짓 발짓을 동원해 열심히 답변해 나갔어요. 그러다 면접관들 표정이 아리송해진다 싶으면 무리수를 둔 멘트까지 뻔뻔하게 날렸어요.


"보다시피, 내 미소가 백만 불짜리 미소잖아? 이 백만 불짜리 미소로 다가가는 서비스가 기대되지 않니? 보이지, 보이지? 백만 불짜리?" 저는 일곱 명의 면접관들을 고루 살펴보면서 제 얼굴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어요. 처음에는 면접관들이 뭐 이런 뺀질한 애가 다 있나 싶은 표정을 짓다가 못 당하겠는지 웃음을 터뜨리더라고요. 그러자 한 면접관이 "에이, 노노! 원 달러, 원 달러~!" 하고는 손을 내저었고, 뒤이어 제가 울상이 되자 면접장은 웃음바다가 되었어요. 실제로 면접관들의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는 면접자는, 면접관을 웃게 만든 면접자라고 해요.


저는 앞으로 비행에서 승객 한 명, 동료 한 명을 웃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해낸 비행으로 여기려고요. 다른 사람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하는 일은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참 기특한 일이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웃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더라고요. 결국 상대를 웃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나를 웃게 하는 거죠. 여러분도 내일 학교나 일터에서 혹은 면접장에서 가벼운 농으로 주변 분위기를 훈훈하게 달구어보세요. 분명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웃어버리기 이전에 먼저 웃음을 머금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코로나 때문에 걱정하는 분들이 혹시나 계실까 해서 말씀드립니다. 예전에 작성했던 글을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최근에는 미국에 다녀오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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