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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 돼지 May 14. 2020

승객 싸움에 승무원 등 터진다

승무원의 화법

"저기요! 앞 좌석 승객이 좌석 등받이를 너무 젖혀서 자리가 좁은데 어떡해요? 뒷좌석 승객은 발로 자꾸 제 좌석을 쳐서 깜짝깜짝 놀라요."


기내에서 종종 듣는 소리다. 저 손님이 신발이랑 양말까지 벗고 있는데 발냄새나요, 아기 좀 조용하게 해주세요, 옆좌석 사람 이어폰에서 음악 소리가 다 들려요, 잠을 못 자겠어요. 승객들은 지나가는 승무원을 붙잡고 이런저런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셨군요, 손님. 그럼 직접 말씀하세요. 이렇게 대답한다면 나는 바로 컴플레인을 받겠지만 때때로 직접 말하라고 내뱉고 싶기도 하다. 어떤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고 청하는 일은 참 난감하기 때문이다.


신입 시절에는 승객 앞에서 말할 때 얼굴이 빨개지거나 어버버 말을 절기 일쑤였다. 말한다 해도 직설적으로 해버려 오히려 승객 화를 돋우었기에 안 하느니만 못했다. "손님, 앞에 앉은 손님이 좌석 좀 발로 차지 말라고 하셔서요. 조심해 주실 수 없나요?" 이 소리를 들은 손님은 가만있지 않고 앞 좌석 손님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한다. "아니 누구는 치고 싶어서 치나~ 좌석을 완전 뒤로 확 젖혀서 나도 좁으니까 그러지~!" 앞 좌석 손님이 참지 못해 뒤를 홱 돌아보고 뒷좌석 손님은 내가 뭐 틀린 말 했냐는 식으로 나오면 결국 승객 간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승무원인 내가 싸움을 부추긴 거나 다름없다.


내가 한 잘못은 첫째, 앞 좌석 손님을 지칭하면서 나는 뒤로 쏙 빠졌다는 점. 둘째, 발로 차는 행위를 큰 잘못인 것처럼 취급했다는 점이다. 나는 가운데서 말을 전하는 입장이다. 말을 전한다고 뒤로 숨는 건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점을 피력해야 한다. 게다가 나는 승객이 발로 앞 좌석을 몇 번이나 어떤 강도로 찼는지 당해보지 않아서 모른다. 이코노미 좁은 좌석에서는 자세를 바꾸거나 움직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앞 좌석을 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앞 좌석 승객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먼저 뒷좌석 승객에게 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은 지부터 묻는 게 순서다. 불편하다고 한다면 한쪽이라도 트인 통로 쪽 좌석이나 앞이 트여있는 맨 앞 좌석으로 옮기는 것은 어떤지 제안도 해본다. 좌석까지 옮기지 않아도 대부분 그렇게 물어보고 제안하는 과정에서 승객은 자기가 앞 좌석을 발로 찬 행동을 충분히 인지하고 더 조심하기 마련이다.


발냄새 주인공으로 지목 당한 손님에게도 절대 직접 말해선 안 된다. 나는 모르는 척, 에어 페브리즈를 주위에 뿌리면서 승무원이 뒤늦게 갤리에서 식사를 하느라 음식 냄새가 나서 그런다고 귀띔해 준다. 내심 찔리면 발냄새 승객도 양말과 신발을 도로 신겠지만 아니어도 할 수 없다. 발냄새난다고 컴플레인 한 승객을 위해 적어도 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여기서 키포인트는 상대가 아니라 '나'에 초점을 둔 행동이나 심정이다. 나는 급하게 택시를 타더라도 빨리 가달라고 재촉하듯이 말하지 않는다. "기사님, 빨리 가주세요."가 아닌 "기사님, 제가 좀 급해서요..."라고 말문을 튼다. 기사님은 당연히 후자에 더 크게 반응한다.


얼마 전에는 바로 앞 뒷좌석 손님끼리 싸움이 났다. 뒷좌석 승객은 탑승할 때 앞 좌석 승객이 가방으로 뒤에서 밀쳐 발을 접질리느라 구두 앞코가 까졌다고 주장했다. 발목도 삔 것 같다며 보상을 받아야겠다고 앞 좌석 승객의 얼굴에 핸드폰을 마구 들이밀어 사진까지 찍었다. 앞 좌석 승객은 다시 나를 불러 자기 사진 좀 지워달라고 말했다. 나는 뒷좌석 승객에게 다가가 욱한 심정은 알겠지만 동의 없는 촬영이 법적으로는 손님에게 오히려 해가 될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손님을 생각하는 '나'의 심정에 초점을 두고 말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촬영한 걸 가지고 왈가왈부해야 하는 입장에서 나도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뒷좌석 승객은 직접 사과하고 지워달라고 말하면 기꺼이 지워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럼 또다시 앞 좌석 승객에게로 가서... 그러고 다시 또 뒷좌석 승객에게로...... 바로 앞 뒷좌석인데도 서로가 이야기할 생각은 전혀 없고 나를 통해서만 말하고 싶어 했다. 가운데서 내가 이리저리 끙끙대는 모습에 보다 못한 옆에 앉은 승객이 한 마디 했다.


"거 참. 승무원이 저렇게 애쓰는 데, 그냥 좋게 좋게 푸시죠."

주변 승객들도 고개를 끄덕이자 뒷좌석 승객은 마지못해 사진을 지워주었다. 나는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을 겨우 식힐 수 있었다.


매일 이어지는 비행에서 기내 관리자로 평화로운 기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나서곤 한다. 중간에 끼인 입장에서는 앞사람이 한 말을 뒷사람에게 그대로 옮기지 않아야 할 때가 더 많다. 나는 사실보다 감정을 건드리며 관계를 맺을 때 상대의 마음이 살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실은 이 같은 모습은 우리 일상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오늘 회식이라고 아침에 말했잖아." 사실이다. "회식 자리가 더 길어질 것 같은데 어떡하지..." 이것도 사실이지만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하며 미안해하는 '감정'까지 느껴진다. 결국은 사람 감정에 관한 문제다. 우리는 때때로 이 부분을 간과하고 사실만을 내세운다. 사실이 이런데 나보고 뭐 어쩌라고!!! 사실이 그런 거?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사실 때문에 내가 어떤 마음인지 너는 알고 있느냐, 그 말이 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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