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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 돼지 Jul 03. 2020

승무원은 커피도 못 마시나요?

                                                                                                                                                                                                                                                            

"나는 승무원들이 커피 들고 다니는 거랑 핸드폰 보는 게 딱 질색이더라."


비행 전 합동브리핑(기장과 승무원 간의 브리핑)을 할 때 나온 말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전직 국내 대형 항공사에서 이십오 년 넘게 근무했던 기장이다. 그래서 더 놀라웠다. 항공업계에서 반평생 몸담으며 매일같이 승무원과 비행하는 사람이 내뱉은 말이라니.

이 말에 충격받은 나는 국내 다른 항공사에서 일하고 있는 몇몇 친구에게 전했다. 그리고 더 놀라운 말을 들었는데, 실제로 승무원이 커피 잔을 들고 다니지 말라는 권고 사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놀랄 일도 아닌 게 내가 일본항공사를 다닐 적만 해도 그랬다. 그만둔 지 3년이나 되어 잊고 있었다. 


일본항공사에서 나를 비롯해 동기들이 받은 컴플레인만 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꽤 있었다. 승무원이 하품을 했다, 눈에 안약을 넣었다, 립스틱을 덧발랐다 같은 컴플레인 말이다. 이 컴플레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장소다. 모두 갤리에서 이루어진 행동이었기에 우리는 매니저에게 항변했다. 기내 한복판에서 승객들이 보고 있는데 한 게 아니라 갤리에서 재빨리 했다고, 억울하다고 말했다. 매니저는 고상하게 맞받아쳤다. "그러니까 화장실에서 했어야죠" 나는 그 후 화장실에서도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조심스러워졌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다 가도 뒤에 사람이 오면 얼른 비켜주었다. 매니저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했어야죠"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동기와 하네다 공항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셨다. 유니폼 차림이었고 우리는 며칠 뒤 매니저에게 불려갔다. 매니저는 컴플레인이 들어오자 그날 그 시각 하네다 공항에 있을만한 한국인 승무원을 추적했다. 승무원이 카페에서 한가하게 커피나 마시고 있다는 컴플레인이었다. 매니저가 카페나 식당에 갈 거면 사복으로 갈아입으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비행만 끝나면 바로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입고 싶어 했던 유니폼이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해외 공항에서 게이트로 이동할 때는 외국 항공사 승무원들이 스타벅스 앞에 줄을 서 커피 사는 모습을 보았다. 보기만 했다. 일본인들 무리에 섞인 나는 마실 수 없는 커피였다. 한국 시간으로는 밤을 넘긴 새벽 시간대라 졸린데도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때 시원한 커피 한 잔 마시면 딱 좋을 텐데, 생각만 하며 하품을 했다. 아, 여기서 말하는 하품은 또 컴플레인 받을 수도 있으니 입을 앙 다물고 콧구멍만 벌름벌름 커지게 하는 하품이다.  


승무원은 서비스직이기 이전에 안전요원으로 존재한다. 항공안전법 제2조에서는 객실승무원을 항공기에 탑승하여 비상시 승객을 탈출시키는 등 승객의 안전을 위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특히 아시아 계열 항공사가 승무원의 역할보다는 이미지를 중시해왔다. 세세한 행동 규제는 물론 국내 항공사는 그동안 승무원의 머리 스타일을 엄격히 제한했다. 머리 길이가 어깨를 넘어갈 경우 쪽머리를 해야 했고, 짧은 단발머리도 허용했지만 염색이나 펌, 탈색은 불가능했다. 

얼마 전에는 중국 항공사의 한 승무원이 사내 적정 기준 몸무게를 초과했다는 이유로 비행 금지령을 받았다. 인도 항공사인 에어인디아에서는 사내 기준 체중 이상의 몸무게를 가진 승무원 125명을 영구히 비행 업무에서 제외한다고 밝혔다. 대한항공도 일전에 한 승무원이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전년 혹은 전 분기 대비 몸무게가 일정량 이상 증가하면 경고장을 받는다고 말했다. 과한 처사다. 


단아한 외모에 날씬한 몸매를 가진 승무원이란 이미지를 만든 배경은 바로 승무원을 고용하는 항공사였다. 국내 항공사는 승무원의 용모에 중점을 두고 복장을 제한하며 승무원의 여성성을 강조했다. 2018년 아시아나항공은 배우 이수민을 전속모델로 내세웠다. 당시 17살이었던 이수민은 '아시아나 항공 역대 최연소 모델'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승무원의 전문성보다 어린 나이와 외모를 강조하는 광고야말로 승무원의 이미지를 그릇되게 만든 것이다. 


안전보다는 외모와 서비스에 치중한 승무원이라는 인식 탓에 누구보다 힘든 건 우리 승무원이었다. 이제는 항공사가 먼저 나서서 승무원의 그릇된 이미지를 바로잡아야 할 때다. 기내에서 제공된 라면이 설익었다는 이유로 승무원을 폭행했던 라면 상무부터 시작해 승무원에게 폭언에 폭행을 일삼는 승객은 다름 아닌 항공사가 만들었다. 폭행으로 혹여 승무원이 다치기라도 하면 비정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승무원은 다른 승객의 안전까지 책임지기 힘들다. 그런데도 승객이 갑질을 하는 까닭은 매사에 죄송하고 친절한 인형 같은 승무원에게는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배경에는 항공사가 큰 역할을 해왔다.  


기존 국내 항공사가 구축해놓은 승무원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8년 8월에는 국내 항공사 최초로 티웨이 항공이 승무원 두발 자유화를 시행했다. 승무원들이 헤어스타일을 만드느라 겉모습에 치중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승객 안전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머리카락 한 올 삐져나오지 않게 하는 쪽머리 같은 경우는 시간도 오래 걸리며 스프레이를 필수로 써야 한다. 승무원들이 불편을 호소하는 가장 큰 부분이었다. 제주항공은 같은 해인 4월에 승무원 안경 착용을 업계 최초로 허용했다. 또한 여성 승무원 구두 착용에 대한 규정을 바꿔 개인 선호도에 따라 구두 굽을 조정해서 신게 했다. 대부분 항공사에는 구두 착용 규정이 있어 항공기 밖에서 구두 굽이 5-7cm인 램프화를 신어야 했는데, 이는 여승무원의 여성성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제주항공이 이 규정을 없앤 것이다. 티웨이 항공과 제주항공은 감정 노동의 대표적인 직군인 승무원이 느끼는 불편을 덜어주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조직 풍토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변화하는 추이를 보며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승무원이 커피랑 핸드폰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게 질색이라는 기장의 말에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대체 왜 그럴까. 우리가 뭐라고. 기장의 그 말이 무섭도록 서늘한 점은 직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두발이나 안경 착용 규제를 넘어 개인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제한해도 괜찮다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내가 일했던 일본항공사가 그랬고, 땅콩 회항 사건이 일어난 대한항공이 그랬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지'라는 말을 몸소 느끼게 해준 건 오히려 회사였다. 그게 싫으면 나가라는 식, 너 말고도 승무원 하고 싶어 하는 지원자들은 널리고 널렸다는 식. 그 밑에서 일하는 승무원은 주눅이 들고, 이는 고스란히 승객에게 전달되기 마련이다. 그러면 다시 승객은 승무원을 무시한다. 악순환이다. 


작년에 나는 김포공항에서 처음으로 긴 머리를 흩날리고 다니는 티웨이 항공 승무원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설렜다. 서비스 시에는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게 묶는다면 문제 될 것도 없겠다. 우리 회사는 아직 두발 규제가 있지만 커피는 들고 다니며 마셔도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기장의 저 발언에 더해 몇몇 사람이 우리가 커피 마시는 모습을 꼴 보기 싫어한다면, 우리에게도 권고사항이 내려질 거란 생각에 무섭다. 권고사항은 말이 권고이지 무언의 압박이다. 나는 그저 커피 한 잔이 먹고 싶을 뿐이다. 그게 그렇게 질색팔색 할 일인지는 정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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