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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 돼지 May 08. 2020

미안한데도 미안하지가 않아

그런 사람이 있다.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부터 주저하게 만드는 사람. 그 사람의 실망스러운 표정이나 불편해하는 기색이 너무나 잘 짐작되어 말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람 말이다. 되려 내게 되돌아올 질책과 힐난이 걱정되어 애초에 입을 다문다. 입을 다물고, 나는 그 사람이 싫어할 그 짓을 그냥 미루거나 안 해버린다.


이런 사람도 있다. 말하기가 전혀 꺼려지지 않는 사람. 어떤 말을 해도 그 사람 앞에서는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사람 말이다. 내가 한 말에 크게 개의치 않아 하는 사람 앞에서는 편안하다. 여기서 '개의치 않다'라는 건 주의 깊게 듣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본인에게 실망감을 안기는 말이더라도 그 말을 한 상대가 미안해하지 않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는 뜻이다. 뚱목이는 내가 미안한 마음으로 이야길 꺼내면 그 이야기의 서사를 희화화시킨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 오늘 저녁에 친구 좀 만나야 할 것 같아. 혼자 저녁 먹어야겠는데 어쩌지..

ㅡ진짜? 아싸! 게임해야지!


이번 주말에는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어디 나가지도 못할 것 같아.

ㅡ진짜? 아싸! 나는 그럼 오래간만에 집에서 바쁘게 뒹굴뒹굴해야지!


다음 달에 비행이 많이 나와서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겠어..

ㅡ진짜? 아싸! 갈산동 촌놈들 불러 모아야지.



신혼인데도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내지 못해 미안한 마음으로 말문을 여는데 뚱목이가 좋아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오히려 내가 호통을 친다. 나는 뚱목이를 째릿 흘겨보다 이내 웃어버린다. 그는 그렇게 내가 그에게 미안해할 마음의 여지조차도 남기려 하지 않는다.




얼마 전 추석 때 일이다. 서울에서 경상북도 영천과 안동까지 운전을 해서 가야 했다. 영천에는 우리 엄마가 있고, 안동에는 뚱목이네 할머님이 계신다. 우리는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는 양가 어른들에게 인사드리러 내려갔다.

나는 스무 살 때 운전면허를 땄지만, 내내 장롱면허 신세로 지냈기에 운전은 오롯이 뚱목이 몫이었다. 엄마는 나보고 조수석에 앉아 처자지만 말고 뚱목이가 졸리지 않게 옆에서 커피도 주고, 과자도 먹여주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차멀미를 해 차만 타면 뒷좌석에 누워서 잠자는 나를 잘 알기에 하는 소리였다.


티맵에서는 도착 예정 시간이 5시간으로 나왔다. 뚱목이는 운전을 시작했고, 언제나 그랬듯이 조수석의 엉뜨를 2단계로 맞춰주었다. 내가 뜨뜻한 엉뜨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차가 부드럽게 나아가고 뜨끈한 기운이 엉덩이로 올라오자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고개가 거꾸러지다 퍼뜩 잠에서 깬 나는 뚱목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웅얼웅얼 말했다.


너 운전하는데.. 나는 잠만 자고.. 미안. 근데 너무 졸려서..

ㅡ제발 옆에서 쪼잘쪼잘 대지 말고 잠이나 자. 조용~해서 운전하기 너무 좋은데, 나 운전 좀 편하게 하자.


나는 잠결에 뭐, 쪼잘쪼잘? 우씨.. 하며 제대로 졸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목베개에 안대까지 차고 숙면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에서는 하던 대로 아예 뒷좌석으로 가 누워서 잤다. 내가 그럴 수 있던 까닭은 단 하나다. 뚱목이가 그게 자기한테 좋다고 말해서다. 그러는 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고 내세워서다.

뚱목이는 너를 위해서, 네가 편안하게, 너는 부담 갖지 말고, 그런 말들을 구태여 늘어놓지 않는다. 그런 식의 '나를 위하는 말'은 나를 위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듣는 순간 이상하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말이다. 상대가 나를 위해 배려한다는 '티'가 들어간 말이라서 그렇다.


그는 내가 앞에 나서서 미안해야 할 상황에서 그 자신을 먼저 앞세우면서 나를 지워버린다. 나는 갑자기 없어진, 미안해야 하는 내가 사라지자 슬며시 웃으며 그를 흘겨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웃어버린다. 그러면 끝이다. 미안해하지도 않고, 괜찮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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