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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 돼지 Jun 04. 2020

어이없는 웃음이지만 웃음은 웃음이니까

이미 새벽 두 시에 가까운 시간이다. 나는 채도가 낮은 조명 하나만을 켜놓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다. 조금 전까지 영 언니와 통화를 했고, 나는 괜히 맥이 빠져버려 그냥 뻗어있는 것이다. 영 언니는 얼마 전 힘든 일을 맞이해 잠을 잘 못 자는 듯했다.


"어... 아니야. 나도 잠 못 자고 있었어. 언니, 벌써 늦었지만 오늘은 부디 잘 좀 자. 내가 뭘... 내가 위로가 됐는지 모르겠다.. 응, 잘 자. 내일 연락할게."


갑작스레 전화를 걸어온 언니가 쏟아내는 말은 새벽 시간 특유의 고요함 속에서 더욱 크게 잘 들렸다. 언니는 말하는 중간중간 힘에 부치는지 잠깐씩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나는 언니가 그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그 숨소리에 기대어 짐작해볼 뿐이었다.


혹자는 그저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위로를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내 앞에서 그간 쌓아온 심정을 토로하는 사람에게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게 내겐 더 곤욕이다. 힘들게 얘기를 꺼냈다면, 얘기한 후에 뭔가 조금은 달라지거나 얻어 가는 게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잘 들어주기만 한다면 말한 사람의 마음이 무조건 후련해질까. 오히려 상대의 의중을 알 수 없는 반응에 내가 괜히 말했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나는 귀 기울여 듣다가 대화 말미에는 상대가 일부러 외면했던 부분을 콕 짚어내거나 새로운 혹은 색다른 대안을 제시하곤 했다. 상대는 "그렇게는 생각 못 해봤네. 고마워. 그렇게 해볼게."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면 조금 같잖은 뿌듯함이 들기도 했다.


그런 나도 오늘 전화 통화에서는 입이 굳어버렸다. 내가 쉽게 왈가왈부할 수 있는 덩어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언니가 하는 말을 온전히 받아만 낸 나는 그대로 누워 뒤척이다 언니도 아직 잠 못 들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앞으로도 무수한 밤을 그럴 테지만, 그건 오롯이 언니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이다 네이버 클라우드까지 들어가 오래전 사진들을 보았다. 사진첩을 내리면 내릴수록 몽실이가 자주 등장했다. 나와 15년을 함께 한 몽실이는 코가 납작한 모양이 귀여운 시추 종으로 내가 처음 키워 본 강아지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키웠는데, 맞벌이하는 부모님이 늦는 날에도 몽실이랑 함께여서 외롭지 않은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캄캄한 밤에도 거실 형광등 불빛 하나를 켜놓고 그 밑에서 몽실이 발바닥 꼬순내를 맡고 있으면 무섭지가 않았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내 학창 시절을 함께 한 몽실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날, 집에 바로 들어가기가 싫어 부모님께는 조금만 걷다 들어가겠다고 했다. 나는 걷다가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길거리에서 꺼이꺼이 통곡을 했고 급기야 멀쩡히 서 있는 나무를 발로 걷어차다가 끌어안고 울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사람이 너무 슬프면 주위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울다가 지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뚜벅뚜벅 걸었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난 쭈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쭈니는 요크셔테리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우남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다. 쭈니도 우남이를 제 자식처럼 끔찍이 여겼기에 나는 쭈니라면 몽실이가 떠난 그 슬픔에 대해서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갔고, 쭈니는 쾌활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때여??!"


[참고로 쭈니는 주현이라는 이름에서 본인이 지은 닉네임인데, 주현이-쭈현이-쭈혀니-쭈니가 된 거다. 쭈니는 애교가 정말이지 너무 많아 은빈이라는 내 이름조차 은빈이-은삔이-응삐니-웅삐로 만들어버렸다. 애교로 친구들에게도 존댓말을 하며, 본인을 3인칭 주어로 삼아 곧잘 얘기한다.]


나는 조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쭈니... 뭐해?"

"쭈니 개그콘서트 봐여~! 웅삐는 뭐해? 근데 왜 목소리가 안 좋아?"


그렇게 울었는데도 몽실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다시 말하려니 울컥해서 울먹이며 말했다.


"응... 그게 아니라, 몽실이가... 몽실이가 오늘 무지개다리를 건넜어. 그래서 너무 슬퍼서.. 그냥 전화해봤어."

일시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잠시 조용해져 나는 코를 훔치며 되물었다.

"쭈니...?"

곧 큰 소리의 울음이 돌아왔다.

"흐흑...! 흐어엉."


나는 당황해서 울컥하던 마음이 사라져서 허둥지둥하 물었다.

"쭈니... 울어...? 네가 왜 울어."

"나는 웅삐가 그렇게 슬퍼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개그콘서트나 보면서 웃고 있었단 말이야아아아아아. 흐아아어어아앙."


울음에서 당황 모드로 바뀌었던 나는 이제 웃음 모드로 바뀌어 웃으면서 허탈하게 말했다.


"아니... 야. 슬프긴 슬픈데, 왜 네가 우냐. 너 몽실이 본 적도 없잖아."

"그러니까아아! 본 적도 없는 데 벌써 죽었어! 흐어어아아엉."


그렇게 쭈니는 몇 분간 더 울어댔고, 나는 오히려 웃으면서 우는 쭈니를 달랬다. 전화를 끊을 때 나는 어이 없게 웃고 있었다. 어이없는 웃음이지만 웃음은 웃음이었다. 웃어버리자 몽실이가 죽은 게 마냥 슬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몽실이는 내게 정서적으로 큰 역할을 했고, 제 수명대로 살 만큼 살다가 갔다. 함께한 시간이 지극히 행복했으나 이제는 고마운 마음으로 보내줘야 함을 알았다.


그 후로도 나는 그와 비슷한 경험을 더러 했다. 내게 화나는 일이 생겼을 때, 나보다 더 분노하는 상대의 모습에 오히려 화가 누그러지던 일. 내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나보다 더 신나라 하는 상대의 모습에 경솔해지지 않게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던 시간. '내 일'에 나보다 더 크게 반응해 주는 사람의 모습은 오히려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않고 중도를 지키도록 해주었다.


사진첩을 나와 시간을 확인하고 핸드폰 화면을 껐다. 언니가 조만간 다시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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