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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 돼지 Jun 20. 2020

합격하셨습니까?

 "축하합니다. 합격하셨습니다."


기분 좋은 문구다. '합격'이란 말은 안도감을 먼저 안겨 준다. 타인에게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는데, 합격이란 말은 어쨌거나 자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진 기분이 들게 해준다. 그래서 안도감이 드는 것이다. 나는 일평생 이 '합격'을 쫓아 살아왔다.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취직하기 위해, 진급하기 위해, 이직하기 위해, 결혼하기 위해.


같은 합격에도 기쁨과 희열의 강약이 있다. 어떤 합격은 기준이 헐거워 나름 가뿐하게 통과한 느낌이 드는 반면, 어떤 합격은 도저히 내가 넘어설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결국에 해냈다는 짜릿한 기분을 선사한다. 그래서인지 후자의 합격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승무원 인생의 막을 열어준 ANA 항공에서 합격 메일을 받았을 때의 합격이다.


ANA 항공에 입사하기 전까지 나는 꽤 많은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각각 3번씩 떨어졌었다. 에어부산과 캐세이퍼시픽도 떨어졌다. 승무원 면접에서만 총 8번 탈락했다. ANA 항공 면접이 승무원 준비생으로 치른 9번째 면접이었다. 이번에도 떨어진다면 승무원 준비를 접겠다고 친구들에게 토로하곤 했다. 승무원을 준비한지 10개월째 되는 시점이었다.


ANA 항공 최종 합격 발표가 있는 날, 나는 신사동 가로수길 커피스미스 카페 2층 구석에 앉아있었다. 가로수길 커피스미스는 패션 피플과 된장남녀들이 모여있기로 유명한 카페로 들어가기만 해도 괜스레 기가 죽는다. 커피도 밥값보다 비싸거나 한 끼 밥값에 준한다. 돈도 없는 취준생인 내가 미쳤다고 이 카페에서 한가로이 비싼 커피를 마시고 있을 리 없다. 꽤 규모가 큰 카페이기에 커피를 주문하지 않고 앉아있어도 티가 안 나고 눈치도 보이지 않아서 나는 그 카페에 그냥 앉아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라도 만나지 않으면 합격 메일을 기다리느라 하염없이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메일함을 열어보고 닫아보고 열어볼 것만 같아 부러 친구와 약속을 잡은 것이다. 수다 떨다 보면 발표 시각까지 시간도 잘 가고 초조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는데, 우라질 것이 하필이면 그날 늦었다. 나는 카페 한구석에서 패션 피플들을 흘끔거리다 핸드폰을 꺼내 메일함을 열었다. 도착한 메일은 없었고, 나는 졸아드는 가슴과 함께 고개를 푹 숙이고 새로 고침을 하고, 또 했다.


그렇게 한 15분쯤 지났을까. 기계적으로 새로고침을 해대는데 변함없이 0통이던 메일함에 새로운 메일이 도착해있었다. 제목은 이랬다.


"Job Offer"


그 순간 나는 가슴이 팽팽하게 차오르는 게 느껴졌고,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의미가 어떤 건지 실감했다. 메일함을 열자 '합격'을 축하한다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합격하셨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입사 안내 일정이 적혀있었다. 나는 끄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허세 가득한 커피스미스 카페에서 커피도 시키지 않고 앉아있는 내가 소리까지 내지를 수는 없었기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하는 신호음과 함께 맥박이 빨리 뛰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전화를 받자마자 외쳤다.


"엄마! 엄마! 나 합격했어!"

"뭐?"

"나 합격했다고. 최종 면접에서 드디어 합격했다고!!"


반은 웃고 반은 울며 엄마에게 합격 소식을 전하는 데, 한 여자가 화장실 칸에서 나오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여자에게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의식하며 다시 외쳤다.


"일본 최고 항공사 ANA항공의 승. 무. 원으로 합격했다고오오오!!!!"


그 여자는 관심도 없다는 얼굴로 거울 앞 세면대로 가 멀뚱히 자기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씻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몰라도 그때는 그녀도 나를 부러워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나는 흥분한 마음에 콧바람을 훅훅 내뿜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여전히 커피를 마시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앞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당장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 하는 내가 서있었다. 나는 카페에서 성큼성큼 걸어나가 가로수 거리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살결에 닿는 바람이 시원했고, 햇살은 적당히 따사로웠다. 스쳐 지나가는 패션 피플도 다 멋있게만 보였다. 그렇게 홀로 거리를 걷다 뒤늦게 도착한 친구와 만났다. 합격 메일을 보여주며 호들갑스럽게 웃고 떠들던 기억이 난다.




ANA항공 승무원이 된 이후에는 합격이란 것에서 해방될 줄로만 알았는데, 합격한 이후에도 합격해야만 하는 합격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3개월 교육 동안에는 매일 보는 시험에서 PASS를 해야 했다. 사내 일본어 시험에서는 합격점을 얻어야 했다. 국내 항공사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에 이직 시험도 봤다. 합격한 회사도 있고, 불합격한 회사도 있다. 대부분의 삼십 대 여자가 그렇듯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소개팅에도 나가 잘 보이기 위해, 합격하게 위해 노력했다. 합격해야 할 합격들이 너무 많았다.


합격 = 기쁜 일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합격은 합격 자체로 완전해 보여서 당연히 합격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시험이라면 시험에 합격해야 하고, 사람이라면 그 사람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합격해서 내 삶이 더 충만해지는지, 내가 더 행복해지는지는 그다음 문제였다. 그리고 막상 합격하면 그다음 문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난 또 다른 합격을 향해 다시 나아가야 했으니까.


내 앞에 놓여있는 또 하나의 합격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보낸다. 이번에 합격하면 과연 그렇게 기쁠지, 잘 모르겠다. 이제는 그 합격 뒤에 따라올 무수한 합격들이 버겁다. 바쁜 와중에도 합격과는 무관한 일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로지 그냥 마음이 내켜서 하는 일. 내가 좋아해서 기어코 시간을 내 하는 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손편지를 끄적이거나, 일기를 쓰거나, 음악도 듣지 않고 멍 때리며 공원에 앉아있는 일.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을 쓰거나, 혼자 사는 아빠 생각에 갑자기 아빠를 불러내 저녁을 사주고 밑반찬이랑 과일을 양손 가득 건네는 일. 누구에게 보이지도, 보여줄 일도 없는 사랑이지만 살아가듯이 사랑하는 일.


은유 작가는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는 질문 앞에 무력해진다고 말했다. 내게 좋은 책이 누군가에겐 좋지 않은 책일 수 있어서다. 하지만 좋아하는 책이 뭐냐는 질문엔 자신 있게 답한다. 좋아한다는, 그 느낌에 보다 치중한 말이니까. 그래서 그녀는 작가라는 말보다 글 '쓰는' 사람으로 불리고 싶다고도 말한다.


단순히 합격에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과 좋아하는 사람 덕분에 기뻐하는 사람으로 삶에 충실하게 살고 싶다. 해야만 하는 무료한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이 아닌 진짜 삶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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