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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 Flight May 13. 2020

비행기에서 만난 사람들 (3-2)

- Match made in Heaven or Annapurna -


며칠 뒤 박XX 강사가 훈련원 출근을 시작했다. 신입 승무원들이 들어온 것이다. 신입 승무원 훈련 중에는 한 반에 세명의 강사가 배정되는데, 그녀와 같은 배정받은 남자 강사 두 명은 평소 나와 안면이 있던 '웅'과 '훈'이었다. 웅이는 이미 여승무원과 결혼해서 아들 하나 딸 하나 아빠이고, 훈이는 총각이긴 한데, '시크'한 면이 있어, 같은 반 담임 강사인 그녀에게, 그녀도 훈에게 서로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웅이와 훈이 가끔 나에게 "우리 반 담임 강사, 박 XX 강사가 성격도 좋고, 얼굴도 이쁘고, 똑똑하고, 몸매도 좋고 (이것들이!)" 나랑 잘 맞겠다며 옆에서 부추기곤 했다.


나는 그 당시 인천 서구에 위치한 사택에 살고 있었는데, '웅'이도, 박XX 강사도 사택에 살고 있었다. 같은 반 담임 강사였던 웅이와 박강사는 카풀을 해서 출퇴근을 했고, 나는 같이 카풀하자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박강사가 싫진 않았지만, 아침저녁으로 자전거를 타고 회사를 오가며 만나는 시골 풍경, 숲 속 냄새, 시냇물 소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 편도로 50분, 왕복 거의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내 인생 두 번째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첫 번째는 '지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후,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배가 고팠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니 항상 배가 고팠다. 저녁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도 이때쯤 퇴근하지 않을까? 싶어 곧바로 집 근처 식당으로 가지 않고 사택 아파트를 한 바퀴 돌았다. 돌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아파트를 한 바퀴 도는 동안 그녀를 만난다면 그녀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해야지". 일부러 천천히 돌았다. 너무 빨리 돌다가 그녀가 안 나타나면 낭패니깐... 천천히, 내 고향 충청도 걸음으로, 머릿속으로는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 아이는 몇 명 낳을까? 손자 손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다" 김칫국을 들이켜는데....


한 바퀴를 다 돌 동안 그녀가 오지 않았다. 배는 고프고, 한 바퀴만 돈다고 나 스스로에게 약속했는데, 안 나타나네? 그래서 한 바퀴 더 돌기로 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더 천천히... 더 천천히... 그녀가 나타날 때까지 밤새도록 돌겠다는 각오로 천천히 천천히 아파트를 돌고 있는데, 앗! 저기 그녀 차가 오고 있다.


차 안에는 웅이와 그녀가 타고 있었다. 얼굴은 빨개지고 가슴은 쿵쾅거리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차 안의 그녀와 웅이에게 "안녕"인사를 건넨 후 "밥이나 같이 먹을까?" 말을 건넸다. 눈치 빠른 웅이 "난 가족들과 저녁 약속이 있어. 아쉽지만 둘이 같이 먹어" 웅이가 윙크를 하며 집으로 간다. 박강사와 나만 남겨둔 채...


-- 같이 저녁 먹어요


박강사가 나를 따라나선다. 아파트 옆에 있는 소고기 집에서 우리는 어색하게 밥을 먹었다. 고기도 먹었다. 맥주도 한잔 했다. 얘기도 나눴다. 얘기를 나눠보니 박강사와 내가 좋아하는 게 비슷했다.


내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데, 그녀도 취미가 사진이란다. 내가 한때 썼던 수동 카메라 FM2를 사용해 봤단다.


내가 재즈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녀도 재즈 음악을 좋아한단다. 특히, 재즈 가수 웅산을 좋아한단다. 웅산이라... 난 첨 듣는 이름이지만, 좋아하기로 했다. (나중에 웅산 콘서트도 같이 갔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데, 그녀도 책을 좋아한다고 했다. 특히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전부 읽고 소장하고 있단다. (나중에 내가 좋아하는 책도 빌려주었다. 특히, 지금은 돌아가신 서강대 영문과 '장영희' 교수님 책을 자주 빌려주었다. 모두 다 내가 던진 '미끼'였고, 아내는 내 미끼를 덥석 문 '붕어'였다)


좋아하는 것이 같을 뿐만 아니라, 말투도 왠지 친근하다. 나는 충청도라 평소 말이 조금 느린 편인데, 박강사의 말투도 내 말투 못지않게 차분하고 느릿느릿하다. 고향이 혹시 충청도? 아니냐고 물으니 경상도란다. 경상도 김해... 대학교 때 말투 '쎈' 경상도 출신 동기들이 많아, 그리고 군대 있을 때 나를 괴롭혔던 고참 2명이 경상도 출신이어서, 나는 경상도 사람과는 상종을 안 한다는 개인적인 신념, 똥고집이 있었는데 박강사 앞에서 그 신념이 무너지고 말았다.


좋아하는 것도 같고, 말투도 비슷하고, 왠지 내 앞에 있는 이 사람 맘에 든다. 그러다 문득 "여행 좋아하세요?" 물었다. 그랬더니 좋아한단다. 그런데 휴가가 잘 나오지 않아 여행을 많이 못 갔단다.


- 내가 휴가 내줄 테니, 나랑 네팔 갈래요?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


그녀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겠다"라고 말했다. 단, 낯선 남자와 둘이 가는 건 좀 그렇고, 입사 동기인 여승무원 한 명 더 데리고 가도 돼냐고 묻는다. '물론이지. 나와 함께 네팔만 가준다면야. 하늘의 별도 달도 다 따다 줄 수 있어'.... 그녀는 몰랐을게다. 우리가 몇 달 후 가족이 될지는...


그녀가 팔짱을 낀걸 보니 나보다 그녀가, 나를 더 좋아한 것이 틀림없다.




2001년 첫 해외여행으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다녀온 후 나는 매년 네팔로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났다. 에베레스트 트레킹 2번, 안나푸르나 5번, 랑탕 1번.... 히말라야에 내 땀을 흘리고 발자국을 남겼다. 일주일 이상 휴가가 나오면 무조건 네팔로 떠났다. 처음 네팔을 갔을 때 안나푸르나 여신 앞에서 약속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네팔에 같이 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결혼을 하겠다'라고..... 수년이 지나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네팔 여행을 갈 때는 항상 혼자였다. 가까운 북한산도 나 혼자 다녔다. 여신과의 약속을 수정했다. '아무 여자나 나를 따라 네팔에 온다면 그녀와 결혼하겠다'. 약속 한지 십 년 뒤 그 누구도 아닌, 성격 좋고, 이쁘고, 야무지고, 무엇보다도 나랑 말도 잘 맞을 뿐만 아니라 말 스피드도 잘 맞는 박강사가 나와 네팔 여행을 함께 가겠단다. 이건 그냥 결혼하라는 거다.


그나저나 문제는 '휴가'다. 회사는 개인의 휴가보다 비행 스케줄을 우선시하다 보니 승무원은 원하는 날짜에 원하는 만큼 휴가를 쓸 수 없었다. 그녀도 나도 승무원인데, 나는 뭘 믿고 그녀에게 네팔 여행을 장담했을까? 당연히 믿는 구석이 있지 않았을까?


몇 년 전 회사 식당에서 입사 동기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는데 동기 옆에 한 여직원이 있었다. 누구지? 그때 동기가 "너 이 분한테 인사부터 드려라. 네가 잘 보여야 할 분이다" 동기의 말에 물음표를 찍으며 그분께 인사를 드렸는데, 알고 보니 승무원 비행 스케줄을 짜는 부서 (일명 우리 용어로 '편조'라고 한다) 부서에서 근무하는 분이셨다. 나와 인사를 주고받던 그분이 동기랑 헤어지기 전에 "비행 스케줄 곤란할 때 연락하세요" 한 말씀하신다. "그 말 책임 지실 수 있어요?" 내가 물었고,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문득, 그분이 생각났다. 곤란할 때 연락하라고 하신 그분.... 나는 메일을 썼다. 내가 지금 얼마나 곤란한 상황인지, 오랫동안 싱글이었다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에게 같이 여행 가자고 꼬셨는데, 여행 같이 가겠다고 넘어왔는데, 여행 가려면 2주의 휴가가 필요한데, 나와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동기까지 2주의 휴가가 필요한데.... 그때 하셨던 말, 책임질 수 있으신가요?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소원을 들어준다"라고 몇 년 뒤 어느 대통령이 말씀하셨다. 그다음 달 우리 셋에게 이주의 휴가가 찍힌 것을 보고 정말 '온 우주가 박강사와 나를 결혼시키려고 도와주고 있구나'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여행을 떠나기 전 한 번의 위기가 있었다. 박강사 비행 스케줄이 갑자기 바뀌었다. 박강사 원래 스케줄 대로라면 네팔 여행 떠나기 전날 쉬는 거였는데, 당시 대통령님께서 예정에 없던 출국을 하시던 바람에 대통령 전용기 승무원 ('코드원' - CODE ONE - 이라고 한다. 코드원 승무원은 아무나 될 수 없다. 즉, 아내는 최고의 승무원이었다고 에둘러 말하는 거다)이었던 박강사도 대통령을 따라 해외에 나갔다가 여행 전날 밤늦게 입국했다. 네팔 여행 힘들지 않겠냐고, 힘들다고 해도 어떻게든 끌고 갔겠지만, 배려심 깊은 남자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그녀가 도착한, 즉 우리가 네팔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그녀의 컨디션을 물었는데 문제없단다. 나를 따라 네팔을 꼭 가겠단다. 이미 그때 그녀도 나와 결혼을 결심한 것 같았다 (고 지금은 내가 우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만나 인천공항에서 카트만두행 비행기를 타고 네팔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세계에서 8번째로 높은, 높이 8091미터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올라가는데 4일, 내려오는데 3일, 트레킹에만 온전히 일주일의 시간이 소요된다. 베이스캠프는 4,031미터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에 가면 안나푸르나뿐만 아니라 히운츌리, 마차푸차레 등 7천 미터 6천 미터 급 산들을 380도 파노라마 뷰로 볼 수 있다.


베이스캠프까지 가려면 하루에 여섯일곱 시간을 걸어야 한다. 땡볕 아래 서너 시간 이상의 오르막길을 걸어야 하고, 올라갈 수 록 산소가 줄어들어 숨은 들이쉬는데 뭔가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띵하다. 먹는 것도 빵이나 프라이드 라이스 등 소박하고, 침대도 나무판자로 대충 만들어 좁은 침낭에서 몸이라도 뒤척이면 삐거덕 소리에 잠을 깬다.


박강사가 제일 힘들어했던 것은 화장실.... 평소 곱게 컸나 보다. 며칠 동안 시원하게 일을 보지 못했다. 산속 화장실이다 보니 구수한 냄새가 나는 푸세식이 아니면 다행, 수세식의 모양을 한 네팔 식 화장실이다 보니, 그리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 엉덩이가 고생하고 있었다.


트레킹 3일쯤 됐을 때 그녀의 어려움을 알게 된 나는 지나가는 트레커들에게 "Do you have medicine for constipation?" 변비약이 있는지 물었고, constipation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대부분 모를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들에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앉아가지고 두손에 힘을 주며 힘주는 자세) 필사적으로 약을 구했다. 역시나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소원을 들어준다". 삼일째 되는 날 독일에서 온 여자 트레커가 마침 배낭에 있던 변비약을 나눠주었고, 박강사도 그날 오랜만에 시원하게 일을 봤다 수줍게 웃었다. 그 웃음에 내 맘속의 숙변도 시원하게 내려갔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사흘을 걸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고, 이번 여행의 들러리 진주는 그즈음에 "난 여기서 좀 쉴래. 둘이 먼저 가"라며 우리 둘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주었고, 우리는 베이스캠프까지 이어진 고즈넉한 산길을 앞뒤로 걸었는데, 앞에는 7천, 8천 미터급 안나푸르나 산들이 펼쳐져 있고, 갈 수 록 산소는 희박해져 서로의 호흡 소리만 거칠게 들려오는데, 호흡을 고르려고 잠시 멈춰 섰을 때 내가 말했다.


"우리 이렇게 안나푸르나 산 길을 걷듯이, 앞으로 인생의 길을 같이 걸으면 어떨까?"


닭살 돋는 멘트지만, 진짜로 저렇게 얘기했고, 박강사는 부끄러운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소 부족에 따른 저산소증 증상이었던 것 같다). 목적지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우리는 히말랴야 산을 배경으로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었고, 히말라야 여신과 약속한 대로 6개월 뒤 결혼을 하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우리가 다른 데 갔었음 그냥 함께 여행을 한 사이로 끝났을 듯.... 만약에 파리를 갔다면 우리의 시선은 서로의 얼굴보다 명품에, 쇼핑에, 여행지에 더 많이 머물렀을 텐데, 안나푸르나였기에 볼 거라곤 산이나 내 얼굴, 내 얼굴, 내 얼굴, 내 얼굴뿐..... 가끔 힘들면 오빠가 배낭도 들어주지, 허술하게 짜여진 나무다리나 돌다리를 건널 땐 오빠가 손 잡아주지, 변비가 생기니 오빠가 '뚫어 뻥' 찾아 삼만리 해주니, 자상한 오빠의 모습에 안 빠질래야 안 빠질 수가 없지 뭐 안 그래?


"그때 왜 네팔 여행 따라온 거야?"


아내와 결혼하고 얼마 후 물었다. 아내의 대답은 내가 "착해 보여서였단다". 자상하고 착하고, 배려심 많은 남자 같아서.....(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은, 편견에 휩싸여 어쩌면 오해하고 있을지 모르는) 경상도 남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상함에 반했다나 뭐라나. '잘생겨서'라는 대답이 아니어서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나의 반쪽이 내 앞에 나타나 주어서 감사하기 그지없다.


영어에 'Match Made in Heaven'이라는 표현이 있다. 번역하면 '하늘이 맺어준 짝, 인연'쯤 되겠다. 우리말로 하면 '천생연분'..... 아내와 나는 하늘을 나는 승무원, 우리를 이어준 것은 하늘이었으니 우리야 말로 Match Made in Heaven 커플이지 않을까? 혹은 Match made in Annapurna라고 해도 되겠다.


박강사의 몸이 내 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보니 나보다 박강사가 나를 더 좋아했음에 틀림없다 / 글의 흐름 상 할 수 없이 아내와 내가 유니폼 입고 찍은 사진을 공개한다. '불펌'





* 지금 아내는 더 이상 승무원이 아니다. 날개를 접고 땅에서 일하고 있다. 대학교에서 비행을 꿈꾸는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다.


* 결혼 전에 아내는 나에게 "존경할만한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라고 했다. 가슴이 '탁' 막혔다. 나는 존경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기에.... 그렇지만 저런 조건을 걸어 버리니, 결혼에 골인하기 위해서라도 존경할만한 남자가 돼야 했는데, 내겐 무리였다. 지금도 그냥 나 답게 살고 있다. 그렇지만, 아내는 존경할만하다. 항상 나에게는 좋은 아내가. 아들에게는 좋은 엄마가. 학생들에게는 좋은 교수가, 무엇보다도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아내는 존경할 만한 남자를 만나진 못했지만, 나는 정말로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고, 고마운 아내를 만났다. 내가 '아내'하고 아내가 '남편'하면 딱인데.... 서로 전환 수술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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