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ppy Flight May 16. 2020

더 행복한 비행을 위한 도전 (1)

- 객실 훈련원 신입 강사 - 

어느 날, 미국 시카고 호텔 앞 숲속을 산책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걸려온 번호를 보니 한국이다. '누굴까?' 궁금했지만 받으면 전화비가 많이 나올 것 같아 무시했더니 곧 끊긴다. 계속 숲속 산책을 즐기는데, 같은 번호로 다시 전화가 왔다.


'두 번이나.. 누굴까?.. 급한 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다.


"시카고에서 잘 지내고 있어?"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 사무장이다. 그동안의 안부와 근황을 묻는데, 난 그것보다 전화비가 더 궁금하다. 

선배! 어서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선배가 전화를 한 이유는 다음 달 객실 훈련원에서 신입 강사를 모집하는 데 나를 추천하고 싶다는 거였다. (통화 당시 선배는 훈련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객실 훈련원은 신입 승무원뿐만 아니라 기성 승무원들이 교육을 위해 한두 번은 반드시 가야 하는 곳. 그곳에서 근무하는 강사들은 잘 생기고 (이쁘고) 스마트하고, 능력 있는 걸로 아는데, 나는 그런 것들과 거리가 먼 사람인데, 선배는 뭘 믿고 나를 추천할까? 묻고 싶었지만 전화비 걱정에 "알겠다"라고, "귀국해서 통화하자"라며 일단 전화를 끊었다.


호텔에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우니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비행한 지 4년이 지나 이제 비행 업무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비행만 해도 행복하지만 비행 이외에 다른 일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강의 업무는 내가 일반직 인재개발원 근무 시절 좋아했던 업무 중 하나였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뜨거운 에너지가 솟아올랐다.


선배의 추천으로 훈련원 강사에 지원하긴 했지만 지원을 한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훈련원 원장님과 강사님들 앞에서 시강(시범강의)을 하고 면접을 봐야 한다. 강사에 지원한 동료 승무원들은 대기실에서 긴장하며 면접과 강의 준비에 열중인데, 나 혼자 여유를 부린다. 강의는 일반직에서 많이 해봐서 어려움이 없었고, 면접도 입사 면접 때처럼 빨개진 얼굴로 '열정'을 보여주면 된다. 그리고 훈련원장님과 면접관님도 평소 알던 분들이라 나는 편안하게 훈련원 강사 면접에서 합격할 수 있었다.


강사가 되기 위해서는 '객실 훈련원 강사 양성과정'의 산을 넘어야 한다.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강사 과정을 통해 예비 강사들은 강사의 마인드, 강의 교안 및 자료 만들기 등을 배우고 전문 강사 앞에서 수차례 시범 강의를 해야 했다. 강사 과정 진행 강사들은 수년간 강의만 전문으로 해온 분들이라 지적이 날카롭고 매섭다. 마음 여린 여자 신입 강사들은 전문 강사들의 따끔한 지적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나도 지적을 받았다. "너무 싱글벙글 웃으며, 재미있게 강의를 해서 강의 내용에 쏙 빠져든다. 강의를 듣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이 강의를 더 재미있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지적일까? 칭찬일까?


사실 인재개발원 근무 시절 내가 담당했던 업무가 '사내 강사 양성과정'이었다. 회사 내 강의 업무를 하는 직원들을 모아 과정을 진행했던 경험이 있어 힘들기로 유명한 훈련원 강사 양성 과정도 나는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다.


훈련원 강사는 두부류로 나뉜다. 비행을 그만두고 훈련원으로 전직해서 3년 이상 근무를 하는 전임 강사, 혹은 비행을 하다가 강사가 필요한 경우 훈련원으로 가서 일정 기간 동안 강의 업무를 하는 현장 강사.... 나는 비행을 사랑했기에 오랜 시간 비행을 그만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그래서 비행과 강사 업무를 병행하는 후자를 택했다.


내가 담당한 과정은 신입 승무원 안전/서비스 훈련. 승무원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유니폼을 받고 비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강사를 바라보는 신입 승무원들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렇지만 훈련은 엄격했다. 특히나 안전 훈련은 기내 화재 진압, 감압, 응급환자 발생 시 대처, 비상 탈출, 탈출 후 생존 등 승객과 승무원의 생명과 직결되는 부분이 많아 훈련생들에게 엄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생글생글 웃기 좋아하던 내가 엄격한 사람으로 바뀌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선배 강사가 굳은 얼굴로 나를 불렀다.


"안전 훈련 중에는 신입 승무원들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할 필요는 없다. 무섭고 엄할 수 록 강한 승무원이 된다"라고 지적을 했다. 나 자신이 신입 훈련을 받을 때, 생소한 항공 용어와 매뉴얼 때문에 고생한 기억도 있고,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기 때문에 훈련생들이 강사의 따뜻한 강의에서 위안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친절하게 대했는데, 그게 강사로서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모습을 바꾸기로 했다.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무서운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불합격! 그렇게 해서 비상시 살 수 있겠어요! 비상 탈출 명령 더 크게 소리치세요! 승무원 되고 싶은 맞습니까! 승무원 되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집에 가세요!. 그렇지만 사람이 어디 쉽게 바뀌겠는가! 과정 중간중간 비행에서 겪었던 에피소드, 비행하면서 경험한 여행, 사랑받는 승무원이 되는 법 등의 얘기들을 들려주며 교육생들에게 비행에 대한 희망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나는 지킬과 하이드를 오가며 과정을 진행했고, 교육생들은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승무원의 상징인 윙을 가슴에 달았다.


신입 훈련 과정이 끝나면 수료식이 진행된다. 수료식에서는 신입들의 훈련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상영하는데, 이때 수료식장은 눈물바다가 된다. 잠 못 자가며 매뉴얼을 외우고, 시험 보고, 테스트 받는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동영상을 보는 신입 승무원들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강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강사는 신입 승무원들의 엄마 아빠와 같다. 승무원으로 다시 태어나게 도와준 사람들이 강사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날개를 단 자식들이 비행을 하면서 만나게 될 험한 일들에 미리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들이 잘 적응해서 행복한 비행을 하기를, 하늘을 훨훨 날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료식을 지켜봤다. 남자인 나도 참 많이 울었다. 너무 울어 부끄러울 때는 수료식장 복도로 나가 혼자 꺼이 꺼이 울었다. 콧물도 많이 흘리고...


강사를 마치고 비행에 복귀했는데, 공항에서 내가 가르쳤던 승무원을 만났다. "강사님"하고 멀리서 나를 보고 반갑게 달려오는데, 내 앞에서 서더니 통곡을 한다. 비행에서 힘든 일을 겪었나 보다. 공항 한가운데 서서 같이 울었다. 몇 년 뒤 다시 만났는데, 제법 시니어가 돼 있던 그녀. 그때 얘기를 꺼내니 "자기가 언제 그랬냐"라며 환하게 웃으며 시치미를 뚝 뗀다. 십 년이 지난 지금, 내가 가르쳤던 신입 승무원들은 사무장도 되고, 팀장 부팀장의 직급도 맡아 한 비행기의 서비스와 안전을 총괄하며 고객 만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훈련원 강사를 마치고 비행으로 복귀할 때는 '제안서'같은 걸 쓰게 된다. 과정 진행하면서 아쉬웠던 점이나 개선점이 있으면 전임 강사에게 제출하면 되는데, 대부분의 현장 강사는 '만족', '개선 사항 없음'을 의견으로 제출한다. 어느 날 비행 복귀를 위해 훈련 원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원장님께서 나보고 나의 제안서는 특별히 본인이 "직접 받아 보고 싶다"라고, "훈련원 신입 훈련 내용의 개선점을 가감 없이 평가해달라"라고 말씀하셨다. 인재개발원에서 근무했으니 뭔가 색다른 의견이 있을 거라 생각하셨나 보다. 사실 현장 강사 하면서 수 가지의 개선 필요 사항들이 있었는데, 지적은 쉽고 개선은 어렵다고, 내가 지적하고 떠나면 남겨진 몫은 전임 강사들이 고생할게 뻔해 나 역시 '개선 사항 없음'으로 적었는데, 훈련원장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니....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새벽까지 고민하다가 새벽 3시쯤 자판을 두들겨 아침 6시까지 꼬박 밤을 새 가며 훈련원 신입 훈련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에 대한 나의 의견을, A4 6장의 분량의 보고서에 적어 훈련원장님께 보냈다. 제목은 (맞아 죽을 각오로 쓴 - 진짜 이렇게 썼다) '객실 훈련원 신입 승무원 과정 문제점 및 개선(안)'이었다. 보고서를 받으신 원장님께서는 전임 강사들에게 '이강사가 지적한 내용들을 검토해서 훈련원 신입 강의를 보완하라'라는 지시를 내리셨고, 내가 지적한 내용들이 일리는 있으나 수정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어 전임 강사들은 엄두가 나지 않았고, 결국 지지부진한 가운데 "지적한 사람이 개선하면 되잖아"라는 말이 나와 몇 달 뒤 내가 다시 훈련원으로 불려 가서 신입 승무원 훈련 개선 작업을 하게 되었다.


'괜한 보고서를 써서 고생을 사서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나와 현장 강사들이 평소에 느꼈던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어 좋았고, 나의 머리와 손끝에서 대한항공 신입 승무원 훈련의 품질이 결정된다는 생각에,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작업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도중에 신입 승무원 훈련을 위해 땅으로 내려온 한 여승무원을 만나, 나중에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으니, 만약에 내가 훈련원장님께 맞아 죽을 각오로 보고서를 안 썼다면? 내가 훈련원 강사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시카고에서 선배의 강사 추천을 거절했다면? 내가 만약 승무원이 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게 아내를 만나게 해 주려는 신의 섭리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지금은 나도 강사 자리를 후배 승무원들에게 물려주고 비행에만 열중하고 있지만, 훈련원 강사 경험은 비행에서 살짝 비켜간, 그렇지만 더 많은 인연과 소중한 아내를 만나게 해 준 아주 고맙고, 행복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사진 출처 : 구글 / 구글에서 '대한항공 객실 승무원 수료식'으로 검색하니 저 사진들이 나온다. 나도 저기 있는데, 누군지는 묻지 말자. 부끄러워 승무원 사이에 묻히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행기에서 만난 사람들 (3-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