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말, 미국 LA 비행을 앞두고 인천 국제공항 한 게이트에서는 승무원들이 승객 맞을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기내 점검을 마치고 커피를 한잔 마시며 승객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항공기 밖으로 막내 승무원이 차려 놓은 신문 카트가 보인다. 제호가 보이게 반듯하게 차려진 신문.... 승객이 탑승하려면 수 분 더 기다려야 하는데, 남은 시간을 이용해 신문을 들쳐 본다. 그러다가 뭔가에 이끌려 평소 보지 않던 문화일보를 뒤적였다. 신문 한 면이 대한항공 기사다. 우리 회사가 어디를 새로 취항했고, 회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고.... 오른쪽에 아는 승무원 얼굴이 보였다. 그 승무원이 쓴 글의 제목은 'xxx의 에어 카페'였다. 비행기에서 만난 승객에 대한 이야기였다. 승객들이 오기 전에 그 승무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xxx 씨, 문화일보 칼럼 잘 봤어요. 나도 저거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죠?"
미국 LA에 도착해서 핸드폰을 켜니 답장이 와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목요일에 발간되는 문화일보 한 면은 우리 회사 기사로 채워지고, 그곳에 승무원 칼럼이 실린단다. 단, 회사 홍보실의 허락이 있어야 한단다.
홍보실 전화번호를 검색해 보니 마침 아는 선배가 있다.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때까지 싸이월드에 비행을 마치고 나면 짤막한 글을 써오곤 있었지만 일기와 낙서 수준이었다. 좀 더 세련되고 정제된 글을 쓰고 싶었다. 4년 정도 비행했을 때라서 쓰고 싶은 얘기도 많았다.
LA 머물고 있는 동안 선배로부터 메일이 왔다. 마침 글 쓸 승무원이 필요했는데, 잘 됐다며 샘플 원고를 보내달라고 했다. 승무원 라운지에 가서 자판을 두들겨 원고를 쓰고 선배에게 보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다음 주부터 정식으로 원고 써서 보내. 홍보실의 감수를 거쳐 한 달에 2번 문화일보에 실릴 거야. 원고료도 있으니 계좌번호도 알려주고..."
그렇게 시작된 문화일보 칼럼은 2년 정도 계속되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촉수를 예민하게 해야 했다. 평소에는 그냥 스쳐 지나갔을 순간들을 글감으로 잡아두기 위해 주머니에는 항상 펜과 작은 노트를 가지고 다녔다. 평범한 비행보다 사건이 일어나는 비행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승무원이 실수하고, 승객들이 화내고, 비행기는 정시에 출발하지 못하고, 승객들은 다음 비행기를 못 타고, 그때마다 짜잔~ 내가 등장해서 해결하고 그런 것들을 글로 남기는 시간들이 행복했다. 문제를 해결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좋은 글감이 되었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비행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2년 동안 50편이 넘는 칼럼을 썼는데, 나중에는 이 글이 저 글 같고, 저 글이 이 글 같은, '그 나물에 그 밥'같아 자진 하차했다. 맨날 '문제 발생하고 내가 뚝딱 해결했다'식의 뻔한 기승전결이 나도 지겨웠다. 그래도 글을 쓰기 위해 고민했던 시간들이 가끔은 그립다. 그때는 글쓰기 책도 많이 읽었는데... 자판이 멈춘 후 기록도 사라지고 기억도 희미해지고 글쓰기 감각은 무뎌졌다. 십 년이 지난 지금, 그 글쓰기 감각과 기억들을 다시 살리고 싶어 이렇게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글쓰기 기능이 많이 녹슬어 한글 한글 토해내는 게 너무 힘들지만, 글을 쓰는 동안 예전에 느꼈던 가슴의 진동이 조금씩 느껴지고 있다. 요즘은 비행 갈 때마다 수첩과 볼펜을 다시 챙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오늘 비행은 문제가 아주 많이 발생하기를... 승객이 술 먹고 난동을 부리고, 좌석 때문에 승무원에게 화내고, 승무원들이 승객들에게 커피를 쏟고, 비행기는 응급 환자가 발생해 딴 곳에 내리고.... 그럼 좋잖아. 쓸 게 많아서!'
* 아래는 내가 LA 호텔에서 처음 썼던 문화 일보 칼럼이다.
<문화일보 이덕영의 에어카페 - "할 수 있다"하는 이에게 기회가 찾아 오리니...>
사람마다 한두 가지씩 인생의 좌우명이 있을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한두 마디의 짧은 좌우명이지만 어려운 순간에 나를 지탱해 주고, 길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한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내가 과연 그것을 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들 때 고민의 시간을 줄여주고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나만의 좌우명이 있다.
‘할 수 없더라도 우선 할 수 있다고 말하자. 할 수 없다고 하면 기회조차 오지 않는다. 할 수 없더라도 무조건 하겠다고 하자.’
얼마 전 시니어 사무장과 비행을 함께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근무 연수를 물었는데 23년을 근무하였고, 앞으로 정년까지 5년이 남았다고 했다.
그분은 “덕영씨는 지금까지 온 시간보다 앞으로 근무할 시간이 더 많으니 남은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고 잘 보내라"라는 조언을 했다. 당신도 23년의 세월을 뒤돌아보니 남은 건 얼굴의 주름과 뱃살이요, 잃은 건 머리카락 개수와 시간이라고 했다. 비행이 어떻게 보면 시간을 흘려보내는 업무라서 그동안 소리 없이 사라져 간 많은 시간들이 아쉽다는 것이다.
그분과의 대화 중에 ‘소리 없이 사라져 간 시간들’이라는 표현이 내 머릿속을 멍하게 만들었다. 4년이라는 짧은 비행시간 동안 나 역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았는지 뒤돌아보게 했다.
비행을 시작하면 비행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고, 비행이 끝나면 다음 비행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장거리 비행을 다녀오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침대 위에서 시간을 죽이고…. 나도 그렇게 많은 시간들을 흘려보내지는 않았는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시간을 살려가며 비행할 것인가?’ 새로운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보았다. 무엇을 새로 배우거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것(!)들을 다시 시작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찾아낸 해법 중 하나가 바로 ‘문화일보 에어카페’에 글을 써보는 것이었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 때 고민의 시간을 줄여주고,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내 인생의 좌우명이 문득 생각났다. ‘우선 할 수 있다고 말하자.’ 그 결과 지금 나는 로스앤젤레스 승무원 체류 호텔에서 이렇게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많다. 그 많은 시간들을 이렇게 글로 정리해 보고 싶다. 세계 곳곳을 비행하며 여행하고, 보고 듣고 느낀 많은 것들을 에어카페라는 그릇에 차곡차곡 담고 싶다. 시간이 지나면 내 글들도 숙성되어 먹음직스러운 글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쯤 잘 익은 내 글들을 하나씩 꺼내 그 맛을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지금도 네이버에서 내 칼럼을 검색할 수 있다
* 지금도 수 명의 승무원들이 <에어카페>칼럼을 쓰고 있다. 비행만 하는 것도 좋지만, 비행에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비행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즐기게 해주는, 비행 경험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이런 작가? 활동도 추천한다. 당신이 승무원이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