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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 Flight May 19. 2020

더 행복한 비행을 위한 도전 (3)

- 문화 예술 가이드 (Flying Art Ambassador) -

영화에 '오스카 상(Oscar Award)'이 있다면 항공사에는 '머큐리 상(Mercury Award)'이 있다. 그룹 '퀸 (Queen)'의 프레디 머큐리 (Fredie Mercury)와는 관계없다. 머큐리 상은 전 세계 항공사들의 특화 서비스를 평가해 국제기내식협회(ITCA : International Travel Catering Association)가 수여하는 상이다. 수상한 항공사는 항공 서비스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전령 (傳令)의 신, 여행자의 신'을 상징하는 헤르메스(Hermes)를 로마에서는 머큐리(Mercury)라 불렀다. 비행기는 여행을 상징하기 때문에 머큐리 상이라고 부른다.


대한항공은 1998년과 2006년 각각 ‘비빔밥’과 ‘비빔국수’로 머큐리상을 받았고 2007년 3월에는 기내 서비스 부문에서 ‘플라잉 맘 서비스(Flying Mom Service)’로 최우수상(금상)을 받았다. 아시아나항공 역시 2007년 ‘영양쌈밥’으로 식ㆍ음료부문 최우수상을, 2010년 ‘더 차일드 서비스(The Child Service)’로 기내 서비스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사진 출처 구글 - 플라잉 맘 서비스 / 비빔밥 모두 머큐리 상을 받았다.


2008년 회사에서 머큐리 상을 겨냥해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이름하여 '문화 예술 가이드 서비스 (Flying Art Ambassador)'. 당시 대한항공은 세계의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에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서비스를 후원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기내에서도 승무원이 여행 중에 미술관 혹은 박물관 관람을 계획하고 있는 승객들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모든 노선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는 노선, 예를 들어 파리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런던 (대영 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모마 현대 미술관), 쌍뜨 뻬떼르 브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노선 등에서만 제공되는 서비스였다.


서비스를 담당할 승무원을 뽑는다는 공지를 보고 나도 지원했다. 평소 예술과는 거리가 가까운 편은 아니었지만 비행을 하면서 흥미가 생겼다. 남들은 평생 몇 번 못 가보는, 세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집 앞 커피숍 가듯 드나들다 보니 미술 작품에 대해 관심이 생겼고, 관련 책을 찾아보면서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있던 차에 (그렇다고 안목이 높아진 것은 아니지만)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미술/예술에 대한 지식 테스트 면접이 있었지만, 담당자가 아는 선배라서 (꼭 뭐 하려고 하면 아는 사람이 있어 도움을 받는다. 이놈의 오지랖) 면접을 무사히 통과했다. 며칠 뒤 선배가 전해준 두툼한 책 한 권.... 그 속에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까지, 파리 루브르부터 뉴욕 모마까지, 미술책에서 한 번쯤 보았던 예술 작품들, 작가들, 미술관, 박물관에 대한 내용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평소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으로는 승객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문화 예술 가이드 승무원들을 해당 노선 위주로 비행을 보냈다. 승무원들이 선호하는 파리, 런던, 암스테르담, 뉴욕 등의 비행 스케줄이 매달 나왔다. 비행 가기 전 미술 작품에 대한 내용을 외우고, 비행을 가서는 미술관과 박물관에 작품 앞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또 동료 승무원들과 미술 스터디를 만들어 홍대나 신촌 카페에서 만나 시대별, 작가별, 국가별 작품에 대해 공부했다. 때로는, 서울에 있는 미술관을 찾아 미술 작품을 감상하며 미술에 대한 안목을 높이려고 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그전까지는 그냥 캠퍼스에 물감 칠한 작품들이었지만 작가와 작품에 대해 알고 보니 작품이 좀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고흐 작품이 좋았다. 그의 작품 속 거친 붓감과 색감이 내 가슴속에 칼집을 내듯, 그의 고단했던 예술 인생의 아픔이 전해졌다.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된 그의 작품 앞에서 살짝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있다. 나중에는 그의 초기 작품이 전시된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도 가보고, 그가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던, '까마귀가 나는 밀밭' 작품의 배경이 된 파리 외곽의 오베르 쉬아즈를 찾아가 그의 무덤에 꽃 한 송이를 놓고 오기도 했다.


서너 달의 준비 기간을 거친 후 드디어 대한항공에 '문화 예술 가이드 서비스'가 도입됐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서울의 어느 미술관에서는 가이드 승무원들을 '1일 도슨트 (Docent)'로 초대해 관람객들이 승무원들로부터 미술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출처 : 연합뉴스


즈음 파리 비행이 나왔다. 회사에서는 팸플릿을 가지고 10분 이내로 간단하게 설명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별도로 노트북에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미술관, 미술 작품 안내 자료를 만들었다. 시간과 관심이 많은 승객들에게는 30분짜리 자료를, 짧은 설명을 원하는 승객들에게는 10분짜리 자료를 준비했다.


비행 중에 동료 승무원이 "한 승객이 문화 예술 가이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냐?"라고 물으셨다며 나를 불렀다. 승객에게 노트북과 자료를 가지고 갔다. 시간이 얼마나 되시냐고 물으니 "아주 많다"라고 하신다. 맛보기로 10분짜리로 설명을 드리니 재미있다며 더 해달라고 하셔서 30분짜리 자료도 보여드렸다.


승무원이 승객에게 오랫동안 무언가를 열심히 얘기해 주는 것이 신기했나 보다. 주변 승객들도 "나도 듣고 싶다"라고 하셔서 그날 비행에서 세 팀 정도 문화 예술 가이드 서비스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며칠 뒤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때 파리 비행에서 내 설명을 들은 승객이 "문화 예술 가이드 서비스 덕분에 파리 여행이 알차고 즐거웠다"며 칭찬 편지를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승객의 칭찬에 힘입어 미술에 대한 공부를 더 열심히 했고, 비행을 할 때는 승객들이 찾지 않더라도 내가 먼저 가이드 서비스를 소개하며 접근했다.


서비스가 어느 정도 괘도에 오르자 회사는 머큐리 상에 도전했다. 승무원이 실제로 기내에서 서비스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승객들의 피드백을 모아 자료를 만들어 국제기내식협회 (ITCA : International Travel Catering Association)에 제출했다. 예선을 통과하고 결선까지 진출했다. 결선은 런던에서 열렸는데, 결선 준비 때문에 담당 선배는 야근에 밤샘을 하면서도 "이번에 왠지 머큐리 상을 거머쥘 것 같아"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지만 회사와 승무원, 선배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머큐리 상을 받지는 못했다. 심사위원들이 고심 끝에 다른 항공사 기내 서비스에 손을 들어줬다며 결선전에 다녀왔던 선배가 아쉬워했다.


이후 서비스는 몇 차례 우연곡절을 겪다가 사라졌다. 지금은 더 이상 문화 예술 가이드 서비스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무수히 갔던 박물관과 미술관, 가서 봤던 예술 작품들, 더 알고 싶어 읽었던 책들은 내 비행을 더욱 풍성하고 행복하게 해 주었고, 지금도 내 비행 추억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사진에 나는 없다. 굳이 찾으려고 하지 말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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