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애틀랜타행 비행기 안. 기내는 많은 승객으로 북적인다. 승객이 다 타고 확인해 보니 이코노미 클래스는 빈자리가 딱 하나 있다. 베트남에서 인천 공항을 거쳐 애틀랜타를 가는, 노령에 정신까지 없어 보이는 한 동남아 할아버지 옆 자리가 비어있다. "먼 거리를 걸을 수 없다 (Can't walk long distance)"라는 컨멘트가 붙어 있는 걸 보니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배려해서 지상 직원이 옆 자리를 비워둔 것 같다.
베트남에서 5시간을 날아와 인천 공항에서 두세 시간 대기 후 다시 15시간을 날아가야 하는데..... 인사도 하고 상태도 체크할 겸 할아버지 승객을 찾아갔다. "할아버지, 몸 건강하세요? 애틀랜타까지 잘 가실 수 있으시죠?" 물으니 할아버지 승객, 말 걸어주는 사람이 반가운지 자기가 어디서 왔고, 어디를 가고, 거기 가면 아들 딸이 픽업을 나오는데, 아들은 무슨 일을 하고, 딸은 미국 사람과 결혼했는데 사위 직업은..... 말씀이 끊임없으시다. 이대로라면 애틀랜타 도착 때까지 얘기를 들려주실 것 같다. "네, 할아버지 비행 중에 필요한 거 있음 승무원을 불러주세요"
비행기는 인천공항을 이륙 후 애틀랜타를 향해 날아간다. 한창 서비스를 하고 있는데, 막내 승무원이 급하게 나를 찾는다. 탈 때부터 '지상에서 술을 마셨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얼굴이 빨간 승객이 있었는데, 이륙 후 자꾸 술을 찾아 한잔 한잔 주다 보니 세잔을 넘었단다. 승무원 매뉴얼에는 '세잔 이상의 술을 먹은 승객의 경우, 상태를 확인 후 술 제공 여부를 결정한다'라고 쓰여 있는데, 주변 승객들도 이 승객 때문에 불편해하는 것 같다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다. '어떻게 하긴 내가 가보면 되지'.
차가운 얼음물을 한잔 들고 승객에게 갔다. 승객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내 머리는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군. 막내 승무원 말대로 얼굴이 빨갛군. 한잔 한 것도 있지만, 여행을 오래 해서 햇볕에 얼굴이 탄 나보다. 털모자를 쓰고 있네. 승객이 많아 가뜩이나 덥게 느껴지는 기내인데, 털모자라니. 그래서 자꾸 손부채를 하는구나. 술보다는 얼음물이 필요하겠군'.
승객에게 다가가 얼음물을 건네주며 말을 걸어본다.
- 비행 중에 좋은 시간 보내고 있지? (Are you having fun in the flight?)
- 더할 나위 없이 좋지! (Could't be better)
- 그런데, 미안한 말이지만, 너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담당 승무원과 주변 승객들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은 거 같아 (Sorry to say that although you're having a good time, but the duty crew and the passengers are not having a good time)
- 무슨 말인데? (What do you mean by that)
- 비행기 타기 전에 술을 좀 마셨지? 그리고 비행 중에 술을 세잔 마셨다고 들었다. 너의 건강과 주변 승객의 쾌적을 위해서 앞으로 6시간 정도 너에게 술을 안 줄 생각인데, 너의 생각은 어떠니? (You had drinks before the flight, right? and I heard that you had two wines and one beer during the flight. For your health and other passengers' comfort, it's not a good idea to have more drinks. I am not gonna give you any more alcohol for about six hours from now. What do you think?)
- 한잔만 더 주면 애틀랜타 도착할 때까지 착한 아이처럼 굴게. 아버지가 며칠 전에 돌아가셨어. 난 지금 매우 슬퍼. 술로 그 슬픔을 달래고 싶어. (Just one more beer, please. I will be a good boy till I get to Atlanta. I am very sad because my father died few days ago. I want to get over with it)
취객 승객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 옆의 한국인 승객이 내게 눈빛으로 '저 이 자리 너무 불편해요. 저 승객 좀 어떻게 해주세요' 호소를 하고 있다. 그 승객에게 윙크를 찡끗하고, 취객 승객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 좋아, 마지막으로 한잔 더 줄게. 대신 자리를 좀 옮겨야겠다. 이곳보다는 편한 곳이니 나와 같이 가자. 대신 거기 가서는 조용히 있는 거다. (Ok, One last drink. But let's just move to another seat. It's more comfort there. You will like there. You should sit quite there. Deal?)
승객을 베트남 할아버지 옆 자리로 옮겨줬다. 그 좌석밖에 빈자리가 없다. 그렇지만 두 사람에게는 최고의 좌석이다. 할아버지는 말 상대가 생겨서 좋고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를 가고, 거기 가면 아들 딸이 픽업을 나오는데, 아들은 무슨 일을 하고, 딸은 미국 사람과 결혼했는데 사위 직업은...") 취객 승객은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할아버지의 좋은 말동무가 돼준다 (저는 어디서 왔고, 지금 어디를 가는데, 아버지가 얼마 전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파, 그 아픔을 씻으려 이렇게 술을 마시고 있고....)
멀고도 먼 애틀랜타 가는 길. 모두가 잠든 기내에서 두 사람만이 오손도손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2. 딱 한번, 승객과 승무원도 '연결'해줬습니다.
파리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한 남자 승객이 긴장한 눈빛으로 나에게 쪽지를 건네준다. 이런 식으로 남자 승객으로부터 사랑 고백 쪽지를 받았다는 여승무원들의 무용담을 들은 적이 있긴 한데 '설마 저 남자가 나에게 고백을? 난 남자 안 좋아하는데'. 갤리에 들어가 떨리는 마음으로 쪽지를 펴보니 사연은 이랬다.
"사무장님이시죠? 무례를 무릅쓰고 용기 내서 이렇게 쪽지를 보냅니다. 저는 누구고요, 몇 살이고요, 어디 살구요, 무슨 일을 하는데, 본론은 오늘 비행기에서 자기 인생의 여인을 만났다. (나? 남잔데...)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고백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 그런데 직접 고백하면 그 여인이 놀랄 것 같고, 우선 기내의 어르신 (나? 어르신 아닌데, 거 외모상 나랑 비슷한 연배면서 말이야)인 사무장님께 말씀드리고, 사무장님께서 그 여인에게 제 마음을 전해줄 수 있으신지요..."
쪽지 내용이 정중하고 예의 바르다. '비행기 어르신'이라는 표현이 눈에 걸리긴 하지만.... 갤리 커튼을 살짝 열었다. 내가 몰래 바라보고 있는 걸 승객은 눈치 못채고 있다. 커튼 사이로 그 남자 승객을 스캐닝해본다. '음, 단정하게 넘긴 머리,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짙은 눈빛, 그리고 귀 두 개, 눈 두 개, 코 한 개, 입 한 개. 저 정도면 준수하군. 그나저나 어르신이라는 말만 안 했어도....'
그때 쪽지의 주인공 여승무원이 갤리로 들어왔다. 쪽지를 승무원에게 건네줬다. '이거 뭔가'하는 표정으로 쪽지를 읽어나가는 여승무원, 점점 얼굴에 미소와 화색이 돈다. "두 가지 선택이 있어. 쓰레기통으로 버릴까? 아님 xxx 씨 주머니에 넣어줄까?"
그녀도 오랫동안 사귀는 사람 없이 지내왔단다. 아까부터 그 승객이 자기를 쳐다보는 눈빛이 왠지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단다. 준수하게 생겼고 (귀 두 개, 눈 두 개, 입 한 개, 콧구멍 두 개.. 자세히도 봤다) 승무원이 서비스할 때마다 눈을 마주치고 빙그레 웃으며 "감사합니다" 적절하게 매너 좋은 반응을 보여주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원래 그런 거다) 본인도 "꽤 괜찮은 승객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쪽지를 보내다니 뭔가 귀엽고 재밌다는 생각을 한 건가 "킥킥"대며 웃는다. 그래서 쪽지는 본인의 주머니에 넣어두겠단다. 나는 나중에 남자 승객 옆을 지나가면서 살짝 윙크를 해줬다.
그 여승무원과는 팀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인천공항 도착 후 그렇게 헤어졌고 다시 만날 일은 없었다. 승무원이 8 천명쯤 되기 때문에 같은 승무원을 두 번 만나기는 쉽지 않다. 가끔 '둘이 잘 돼가나?' 궁금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승무원을 만나고, 비행을 하면서 그녀와 그 승객은 잊혀졌다.
그러다가 몇 년뒤 공항에서 "사무장님" 누군가 엄청 큰 목소리와 엄청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부르는데, '누구시지? 난 모르는 승무원인데..... 나의 이상야릇한 표정을 보고 그녀가 묻는다. "저 모르시겠어요? 그때 그 남자 승객 쪽지 저에게 주셨잖아요". "아! 맞다. 그 나에게 사무장 어르신 하던, 그 귀 두 개, 눈 두 개, 코 두 개, 입 두 개.. 아니... 콧구멍 두 개, 입 한 개 승객!. 어떻게 지냈어요?"
비행을 마치고 그녀는 그가 쪽지에 남겨준 전화번호로 문자를 보냈고, 답장이 왔고, 전화가 왔고, 얼굴을 보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자기 아빠를 꼭 닮은 (귀 두 개,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이쁜 딸을 낳고, 지금은 셋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단다. 그날 자기에게 쪽지를 건네줘서 너무 감사했다며 커피를 한잔 뽑아주는데, 그녀의 달달한 결혼 생활 얘기를 들으며 마시는 그 커피는 지금까지 마셔본 커피 중에서 가장 달콤하고 맛있는 커피였다.
* 코로나 19로 여행문이 닫히고, 비행기 날개는 접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승무원들은 '연결'하고 있다. 가족과 가족을, 친구와 친구를, 연인과 연인을..... 보고 싶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연결하고 있다. 빨리 코로나 사태가 끝나, 더 많은 연결이 이루어 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