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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 Flight May 29. 2020

"외국어도 서비스다 (1)"

- 나의 4개 국어 도전기, 첫 번째 '중국어'


1. 내가 중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 계기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나는 지난 7년간 부산에서 단거리 노선 비행을 주로 했다. 장거리 비행을 갔다 오면 아들이 부쩍 커 있어, 매일매일 아들 크는 것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내린 결정이었다 (내 인생 두 번째로 잘한 결정이다. 첫 번째는 아내와의 결혼. 아내도 내 글의 독자임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다. 자기야 보고 있지? 하트 뿅뿅)


* 부산 크루 스케줄은 일반 직장인과 조금(!) 비슷하다. 새벽에 비행 가면 오후에 랜딩, 오후에 비행 가면 저녁에 착륙. 한 달에 서너 번 빼고는 거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잔다. (거의) 밤 안 새고, 가족과 함께 있고, 규칙적으로 생활할 수 있어 부산 비행 생활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부산 그룹에는 약 120명의 승무원이 소속되어 있다. 주로 국내선과 일본, 중국 노선을 비행한다. 어느 날 부산 - 북경 비행을 가는데 중국 승객이 나한테 뭐라고 한다. 중국어를 잘 하지 못하던 때라 함께 근무하는 동료 승무원에게 중국 승객이 말한 발음을 고대로 옮겨다 (입안에 넣고 뒤틀리지 않게 조심조심) 들려줬다.


"xxx씨, 승객이 '화셩'이라고 하는데, 그게 뭐예요?"


"땅콩이잖아요. 땅콩...."


"아하!"


조금 있다가 다른 중국 승객이 나를 부른다. "뉴우나이"뭐라고 하는 거 같은데, 이번에도 그 발음을 본떠서 동료 승무원에게 들려줬다. "우유요. 우유"


"아하!" 중국어를 정식으로 배워보지 않은 부산 승무원들은 중국 노선 비행을 자주 하다 보니 중국 승객들의 말을 대충 알아듣고 있었다. 나만 빼고.... 앞으로도 그렇게 비행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 나의 중국어 도전기


사실 중국어를 조금 배운 적이 있다. 승무원이 되기 전에, 그러니깐 일반직에 있을 때, 대충 2002년도였나 (내 글을 차근차근 읽어온 사람이라면 '나의 욜로 이야기'글에서 내가 중국어 학원을 다녔다는 얘기를 기억할 것이다. 기억 못 한다면 제대로 안 읽은 거잖아!)


당시 종로에 있는 고려 중국어 학원을 두 달 다녔다. 발음 어렵다는 중국어를 두 달 해서 뭔 도움이 되겠냐 하겠지만 지금 내가 중국 승무원들에게서 "발음이 좋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그때 두 달 과정 덕분이다.


내가 두 달 동안 중국어를 배운 분은 '송재복'선생님이시다. 그분은 '중국어 300마디 무작정 따라하기'과정을 진행하고 계셨는데, 이 과정명이 나중에 다른 외국어로 전파되어 '외국어 무따기 시리즈'가 나왔다.


송재복 선생님 수업은 독특하다. 우선 교재가 없다. 교재는 송재복 선생님의 입과 그 입에서 나오는 중국어 발음이다. 한 시간 동안 선생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선생님 입을 보면서 그대로 따라 한다. 의미도 안 가르쳐준다. 그냥 무작정 - 그래서 무작정 따라 하기다 - 선생님 발음을 따라 한다. 한눈을 팔면 선생님이 본인 입 보라고 호통을 치신다. 마치 서당 수업 같다.


한 달 동안 중국어 발음과 300가지의 표현들을 따라 한 후 두 달째부터는 한국어 - 중국어로 따라 한다. 한 달 동안 입에 닳도록 내뱉은 표현들이 한국어로 어떤 의미인지 이때 알게 된다. 그리고 두 달을 마치면 신기하게도 입에서 중국어 300마디가 술술 나온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 두 달 동안 입이 닳도록 외운 표현이라 마치 모국어처럼 중국어가 나온다.


이 과정을 마치고 나면 발음이 좋아진다. 눈으로 보고 (선생님 입 모양), 귀로 듣고 (선생님 발음), 입으로 소리를 내봤기 때문에 배우기 힘들다는 중국어 발음의 체계가 잡힌다.


300마디만 배운 것이 너무 아까워 (송선생님은 300마디 수업만 하신다) 좀 더 배우고 싶은 마음에 다른 중국어 회화 수업을 두 달 더 들었지만 여느 중국어 수업과 다르지 않아 실망하고 (읽고 해석하기), 중국어에 대한 갈증을 해소치 못하고, 실력을 올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다, 나중에는 후퇴하게 되었다. 이후 EBS 초급 중국어 회화 라디오 방송을 들어가며 중국어 실력을 올려보려 했으나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중국어 처음 시작하는 분은 송쌤 책 추천해요. 찾아보면 인강도 있어요. 화질은 좀 오래 됐지만...

                                                        


3. 중국어, 비행기에서 배운다


앞으로도 계속 부산에서 허벌나게 중국을 왔다 갔다 해야 할 텐데, 이 상태로는 동료 승무원들에게 폐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작은 수첩을 하나 구했다. 주머니에 쏙 들어간다. 비행을 가면 수첩에 땅콩은 화셩(花生 Huāshēng), 우유는 뉴우나이 (牛奶 Niúnǎi), 탑승권은 떵지파이(登机牌 Dēng jī pái), 탑승을 환영합니다는 환잉떵지 (欢迎登机 Huānyíng dēng jī)....등등 중국어 표현을 한국어로 적었다.


중국 비행을 갈 때는 중국 승객에게 물었다. (오렌지 주스를 가리키면서) 쩌거 짜오션머 (这个叫什么 Zhège jiào shénme). 이미 오렌지 주스를 중국어로 청즈 (橙汁 Chéngzhī)인건 알고 있었지만 중국 사람에게서 직접 발음을 듣고 싶어서였다.


승객이 청즈 (橙汁 Chéngzhī) 하면 따라 했다. 청즈 (橙汁 Chéngzhī)....그리고는 옆에 있는 걸 가리키며 또 묻는다. 쩌거 짜오션머 (这个叫什么 Zhège jiào shénme) . 피죠우 (맥주, 啤酒 Píjiǔ)....한 명 서비스하고 한 개 물어보고, 또 한 명 서비스하고 또 한 개 물어보고. 우리도 외국 사람이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한국어를 물어보면 더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은가. 중국 승객들도 자기 나라 말을 열심히 배우려는 승무원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하셨다. 쩐빵 (真棒 Zhēn bàng). 그렇게 나는 중국 사람들이 알려주는 단어나 표현들을 냅킨이나 손바닥에 적어 놓고 서비스가 끝나면 수첩에 옮겨 적었다.


중국 노선에는 가끔 서울에서 중국인 승무원이 조인 (크루 용어로 의미는...음...그냥 '조인'이다)하는데 그럴 때는 그때까지 수집해온 중국어 단어와 표현들을 그녀 앞에서 연습했다. 중국인 승무원은 한국어를 배워야 했고 나는 중국어를 배워야 했기에 우리는 비행기에서 서로의 언어를 도와줬다 (이걸 중국어로 후샹빵쭈 후샹찐뿌 (互相帮助互相进步 Hùxiāng bāngzhù hùxiāng jìnbù 라고 하는데 '서로 돕고 서로 발전하다'라는 뜻이다)



4. HSK 도전


그때까지 부산에서 중국어를 제대로 공부하는 승무원은 없었다 (두어 명 있었지만 그들은 그냥 전공했을 뿐,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뉴질랜드 가 있는 박삼장....중드만 봤지 공부는 안 했잖아. 안 그래? 잘 지내지? 뜬금없이 안부는....) 다들 짬밥으로 대충 중국 승객의 니즈를 파악하는 수준이었다. (박xx과 이xx빼고)


어느 날 선배 사무장이 책을 보고 있다. 무슨 책인가 살짝 훔쳐보니 아니! 중국어 책이다.


"선배, 중국어 공부했어요?" 중국어에 관심만 많은, 실력은 쥐뿔인 내가 물었더니 선배가 "아니. 내가 한자 세대잖아. 한자를 잘 아니깐 중국어 책을 봐도 내용이 눈에 들어오네"한다. 내용이 꽤 어려워 보였는데, 한자만 안다고 중국어 공부가 돼? 싶었는데 몇 달 뒤 선배가 HSK 4급에 합격했다.


선배의 합격 소식에 자극을 받아 나도 HSK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르는 단어 투성이었지만, 몇 번 반복해서 보니 단어가 보이고, 문장이 보이고, 단어가 들리고, 문장이 들리고, 나도 두 달 뒤 4급을 합격할 수 있었다.


내친김에 5급도 공부했다. 5급부터 단어량과 문장 길이가 대폭 늘어난다. 혼자 공부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EBSLANG의 리우쌤 HSK 5급 인강을 5번 돌려봤다. 한번 보니 뭔 소린지 모르겠고, 두 번 보니 쬐끔 알겠고, 세 번 보니 고개가 끄덕여지고, 네 번째부터는 딴짓하면서 볼 수 있었고, 다섯 번째는 그냥 자장가처럼 들었다. 그렇게 다섯 번, 여섯 번 인강을 반복해 가며 들으니 6개월 뒤에 나도 5급에 합격할 수 있었다.

 

중국어의 선물(리우) 리우쌤. 리우쌤 강의 들으면 진짜 누구나 합격한다. 내가 산 (live and buy) 증인!



이때쯤 부산 그룹에 중국어 스터디를 만들었다. 중국어 전공자가 2명과 (전공만 하고 중드만 보던 뉴질랜드 박xx하고, 전공하고 공부는 안하던 에어부산 출신 경력직 이xx) 나만큼 중국어 열정이 있던 2명을 더 꼬셔 총 5명이서 중국어 카톡 스터디를 했다. 매일 EBS 포켓 중국어 방송 듣고 카톡에 음성 녹음 올리기...그걸 몇 달 하면서 HSK 공부도 병행했다.


역시나 전공자들이라 빨랐다. 전공자면서도 공부는 안했지만 매일 중드를 즐겨보던, 지금은 애들 데리고 뉴질랜드 가있는 박씨가 HSK 6급을 따더니만, (지금도 쉬고 있나?) 에어부산 출신 중국어 전공자 이씨도 6급을 땄다. 화셩을 화셩이라고 적던 나에게 6급은 너무나 먼 길이었지만 나에겐 HSK 6급 리우! 쌤이 있었다.


리우쌤 인강을 열 번 이상 봤다. 나중엔 배경 음악처럼 들었다. 청소하며 듣고 샤워하며 듣고, 산책하며 듣고,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어 이해라기보다는 암기를 위한 청취였다. 그렇게 2년 동안 HSK를 공략해서 6급을 합격할 수 있었다.


비전공자가 독학으로 6급 따면 잘하는 거 맞죠? (전공자들에게 묻는 겁니다)



5. 비행에서의 중국어 활약기


중국 비행은 '이레 (크루 용어로 IRREGULARITY 즉 '이상 상황'이라는 뜻)가 많이 발생한다. 항공 관제가 아직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툭하면 항공기가 지연된다. 기내 방송은 한국어 - 영어만 하면 되지만 중국 사람이 90% 이상 타면? 그들이 한국어 영어를 알아듣겠는가! 이때 내가 나섰다. 한국어 영어에 이어 중국어로 방송했다.


"지금 공항에 이착륙하는 항공기가 많아 출발이 지연되고 있다. 출발 허가를 받는 대로 출발하겠다"

(由于航空杆子的原因我们的航班推迟了. 受到塔台的出发许可以后我们会出发)


"기장이 계속 관제탑에 연락을 하고 있는데 관제탑이 출발 허가를 안 준다. 공항이 혼잡해서 대기하란다"

(机长一直在与塔台联系. 塔台还没给出发许可. 机场很拥挤, 让我们等待)


"이륙 허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륙 순서는 5번째로 앞으로 10분 뒤에 이륙하겠다"

(我们在等待起飞许可。 起飞顺序是第五个, 十分钟后起飞)


방송하고 나면 기내로 나가 중국 승객에게 물어봤다. "방금 한 중국어 방송 알아들었습니까? (刚才的中文广播你听的懂吗" 물어보면 다 알아 들었단다 (听的懂. 明白明白). 그럼 기분이 좋았다.


한 번은 북경에 도착했는데 주기장을 코앞에 두고 항공기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비행기에는 중국 승객들로 만석이었다. 1시간 이상 기다리다 보니 슬슬 중국 승객들이 올라오기 (화가) 시작한다. 왜 안 가냐고 (为什么不出发) 언제 가냐고 (你什么时候出发) 묻는데, 기장님이 관제탑에 연락해봐도 관제탑은 무조건 기다리란다. 이유라도 알려주지...


동료 승무원에게 포켓 파이를 켜보라고 했다. 와이파이를 잡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뉴스를 보니 그날 중국에 무슨 행사가 있어 각국 대통령들이 방문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대통령 전용기들이 이륙을 하는 시간대여서 보안을 위해 일반 항공기의 출도착을 막고 있었다. 승객들에게 인터넷에서 파악한 내용을 전해주니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해 주셨다. 그  우리 비행기는 3시간 넘게 활주로에 대기했다. 국어를 배운 이래로 가장 많이 중국어를 사용한 비행으로 기억된다. 비행 출도착이 늦어져 김해 공항 착륙 가능 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밤 11시 이후 이착륙 금지) 승무원들은 북경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돌아와야 했다.


* 제주 -> 북경 -> 부산 스케줄. 김해 국제공항은 소음 문제로 밤 11시 이후로는 항공기 운항이 금지된다.


그 외에도 다양한 상황에서 중국어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중국 승객이 아프거나 기상 악화로 회항한 경우, 중국 승객이 짐을 분실하거나, 기내 서류를 작성하지 못할 때... 중국어를 배우니 중국 승객이 보였고 그들을 도와줄 수 있었고 중국어를 배운 보람이 있었다.


이렇게 글을 써놓고 나니 내가 중국어를 아주 잘하는 것으로 오해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든다. 나의 중국어 실력은 어디 내놓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미천한 수준이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부족함을 알기에 앞으로도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내가 하늘을 나는 동안은 언제 어디서든 중국 승객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중국어 도전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不怕慢 只怕站


búpà màn zhǐ pà zhàn


느린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중도에서 그만두는 것을 두려워하라!



* 송재복 선생님을 이후에 다시 만났다. 중국어를 배워볼까 하고 동네 중국어 학원을 찾아갔는데 거기 계신거였다. 너무 놀랍고 반가워 아는 체를 하니 그분이 더 반가워 하셨다. 쉬엄 쉬엄 가리치시겠다며 큰 학원을 나오셨단다.


* 리우쌤은 지금 종로 YBM 중국어 학원에서 HSK를 가리치고 계시다. 5급 6급을 담당하시는데 HSK 점수가 필요한 사람에게 강추한다. 여유가 없는 분은 리우쌤의 ebslang hsk 인강도 추천한다.


* 6월부터 휴직이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4개월 쉬어야 한다. 6월에 종로에 있는 중국어 학원 - 스크린 중국어 - 을 다닐 예정이다.


* 중국어는 매우 매력적인 언어다. 단어 하나 하나 의미가 있고 역사가 있다. 그걸 알아가는 재미가 솔솔하다. 중국어를 잘하면 비행에 큰 도움이 된다. 승무원 도전에도 좋은 스펙이 될 수 있다. 5급까지 도전해 보자. 꾸준히 하면 6개월 내에 5급 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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