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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 Flight May 29. 2020

"외국어도 서비스다 (2)"

- 나의 4개 국어 도전기, 두 번째 '일본어'

1. 내가 일본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


승무원이라면 누구나 입사 후 훈련원에서 일본어를 배운다. 나 때는 일본어만 배웠는데 요즘은 중국어도 배운단다. 그만큼 대한항공을 이용하는 일본인, 중국인 승객이 많아졌다는 의미이다. 일본어 중국어를 배운다고 해서 아주 능숙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훈련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일본어 중국어 서비스 표현 100가지' 정도로 서비스에 필요한 최소한의 배움이다. 좀 더 다양한 주제로 능숙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와 투자(여기서는 '시간'을 의미한다)가 필요하다. 그 의지와 투자에 불을 붙이는 것이 동기 (motivation)인데, 군대 있을 때 받았던 한 통의 편지를 계기로 항공사 입사의 꿈을 키웠듯이, 그날의 비행 경험을 계기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2015년 6월로 일본 나리타를 갔다가 부산으로 돌아오는 비행으로 기억한다. 아침부터 부산 김해 공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6월의 장마 비였다. 그날 부산의 오후 날씨는 짙은 안개에 호우 주의보가 내려져 있었다. "우리 부산 공항에 못 내릴 수도 있겠네요" 오후 날씨 예보를 보며 기장님이 비행 전 브리핑 때 한 말씀하셨다.


일본 나리타 도착 후 승객들이 내렸다. 그리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승객들을 태운 후 비행기는 이륙했다. 부산으로 가는 도중에 기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착륙 시도는 해보겠지만 날씨가 안 좋아 회항 가능성이 높다. 준비를 해놔라".


승무원들과 정보 공유 후 방송문을 꺼내 '착륙 중 재상승'에 관한 방송을 읽어봤다. 그날 일본인 승객이 많았다. 원래는 한국어 - 영어만 해도 되지만 일본 승객들에게 대한 배려 차원에서 일본어로도 연습해 놨다.


준비해 놓으면 꼭 그 일이 발생한다. 우리 비행기는 2회에 걸쳐 김해 공항 착륙을 시도했으나 폭우와 시정 문제로 결국 김포공항으로 회항했다. 목적지와 다른 곳에 내려 승객들이 화를 내실만도 한데 그런 승객은 한 명도 없었다. 김해 공항 착륙 때 창밖의 날씨를 봤기 때문이다. 무섭게 흔들리던 비행기, 비행기를 세차게 때리는 빗소리, 착륙하다가 갑자기 급상승.... 승객이나 승무원 모두 맘속으로 "그냥 내리지 말고 딴 데로 갑시다"를 외쳤다.


일본어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던 언어였다. 대학교 때 2학기를 배웠고, 또 틈틈이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던 경험이 있기에 일본 승객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나서서 일본어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그래도 그날, 김포공항으로 회항한 날을 계기로 일본어를 더욱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지 출처 https://thejoyworld.tistory.com/52



2. 나의 일본어 도전기


잘하는 건 아니지만 대학교 때 2학기 일본어를 수강했다. 겨우 입문 딱지 뗀 수준 정도였다. 대한항공 입사 후 욜로(Yolo)를 추구하던 시절에 종로에 있는 일본어 학원을 다녔다. 입문 수준의 실력에겐 벅찬 '드라마 일본어'과정이었다. 수준은 높았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 강사님이 무척 재미있는 분이셨다. 아재 개그를 쓰면서 약간 오타쿠같이 생긴 이미지... 그렇지만 일본어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파. 지금 강남에서 드라마 일본어를 강의하고 계시는 최대현쌤이다. (그때는 종로에서 강의를 하셨다)


쌤 뿐만 아니라 드라마도 재미있었다. 다음에 전개되는 내용이 궁금해서 결석 없이 학원을 다녔다. 세 달 동안 세 편의 드라마를 보면서 일본어 표현을 외우니까 귀도 뚫리고, 부족하지만 말도 나왔다. 외국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 역시 반복 학습이 최고다. 호타루의 빛 (ホタルノヒカリ) 드라마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백 번도 넘게 봤다. 보기만 한 게 아니라 입으로 대사를 수없이 따라 했다. 십 년도 넘었지만 지금도 드라마 1화 대사는 거의 다 외우고 있다.


(즈또 무카시. 토오이 나쯔노 기오꾸. 오바짱노 이에노 엥가와데 미쯔껫따 찌사나 호타루. 오바짱와 잇따. 호타루와네, 키레이나 미즈또 나가레루 카와또 아리로마마노 시젠가 나케레바 이끼떼 이께나잉다요. 나쯔가 쿠루 타비니 아노히 오사나깟따 와따시노 테노 나까니 잇따 찌사이 호타루오 오마이 다스. 찌사나 찌사나 이마니모 키엣떼 시마이 소우나 하까나이 찌사나 히까리...하면서 진행된다)


2학기 일본어 수강과 세 달의 드라마 일본어 실력을 장착했다 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술술 내 뱉을 수 있는 실력은 되지 않았다. 나는 넓고 깊은 일본어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최대현쌤. 진짜 기적이고 최고다.



3. 일본 직원들과 일본어를 연습하다.


일본 승객들은 얇은 유리 같다. 반짝반짝 빛나지만 잘 못 건드리면 '쨍'하고 깨질 것 같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가끔 승객들에게 궁금한 일본어 표현을 물어보곤 했지만 내가 주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일본 지상 직원들이었다.


부산에서는 나리타와 오사카, 삿포로를 자주 갔다. 갈 때마다 몇 가지 일본어 표현들을 생각해 두었다가 목적지 도착 후 일본인 지상 직원들에게 질문을 하거나 외워온 표현들을 써먹었다. 표현이 정확한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문법에 맞지 않게, 상황에 맞지 않게 쓰면 직원들이 "それわ だめ. 絶対使わないでください" (그거 안돼요. 절대 사용하지 마세요)라고 표현을 고쳐주곤 했다.


그중에서도 나리타 공항의 통통한 여직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가 나리타 갈 때마다 그녀는 "오늘은 어떤 이상한 일본어 표현을 외워왔냐 (今日はどんなおかしな日本語表現を覚えてきたの)"며 나를 반겨주었다. 그녀는 나의 부산에서의 마지막 비행을 아쉬워했다. 더 이상 부산에서 오는 이상한 아저씨 승무원의 이상한 일본어 표현을 들을 수 없다며 섭섭해했다. 나의 부산 나리타 마지막 비행 날에 내 얼굴을 보기 위해 나의 이상한 일본어 표현을 듣기 위해 동료와 근무 스케줄을 바꿔 비행기로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어질 때 그녀의 눈빛이 촉촉해진 것을 느꼈는데 아마도 그녀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었나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4. JPT 도전


내 경험상 (경험이라 쓰고 편견이라 읽는다) 외국어를 배울 땐 기초 정도만 공부해 놓고 시험 준비를 하는 게 실력을 급상승 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시험 합격을 달성해야 할 목표가 된다. 그 목표를 합격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양이 있을 것이다. 그거만 외우면 합격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냅다 외우는 거다. 외우고 나면 합격하고 합격하면 내 실력이 높아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일본어도 JPT로 공부했다. 그전 실력은 어디에도 명함을 내밀기 부끄러운 500점 후반의 성적. 3개월 바싹했더니 750점을 넘었다. 또 3개월 했더니 800점을 넘는다. 800점 넘고 나서는 점수 상승 폭이 크지 않았다. 800점 밑으로 떨어질 때도 있었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가장 높은 등급 (1급)의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LT/RC 각각 430이 돼야 하는데 그 점수를 따기 위해서 총 2년이 걸렸다. 시간이 많이 걸릴 수 록 공부하는 양이 많아지는 거니 간 조바심 갖지 않고 매일매일 한 시간 이상 손에서 일본어 책을 놓지 않았다.


JPT 역시 인강을 봤다. 인강 쌤은 JPT의 신이라고 불리는 '서경원 쌤' 800점까지는 서쌤의 인강과 교재를 보고 900점대를 달성하기 위해서 윤준호 쌤의 교재를 봤다. 윤쌤은 인강은 없고 교재도 오래된 것들인데 (지금은 JPT 강사도 그만두셨다고 한다), 일본어 학습자들 사이에서 "JPT 900점을 넘기 위해서는 윤쌤 책을 봐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답게 책의 내용이 알차고 짜임새 있다.


각각 430점만 맞으면 1급이다. 410점이 나중에 430점이 되어 LT/RC 모두 1급이 됐다.



5. 나만의 일본어 학습법


내가 외국어를 배울 때 자주 애용하는 방법인데, 와이프가 아주 싫어한다. 그게 뭐냐고? 바로 책을 찢는 거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모두 책을 찢어서 공부했다. 우리 뇌는 두꺼운 책을 보면 겁부터 낸다. '저걸 다 봐야 해?' 겁을 내면 책 펼 엄두가 나지 않고, 용기 내 책을 펴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저걸 다 외워야 해?'


그래서 나는 책을 찢었다. 챕터 별로 찢거나 혹은 10페이지 단위로....300, 400페이지 짜리 책을 찢으면 그 수가 수십 개다. 얇아진 책을 보면 뇌가 편하게 생각한다. '요거만 봐도 되는 거야? 금방 보고 놀자'. 가방에도 쏘옥 들어가고 가끔은 반으로 접어 재킷에도 넣어가지고 다니며 틈틈이 봤다. 지하철 기다리면서, 화장실에서, 녹색불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면서, 공원 산책하면서 등등....


찢은 책을 잘 보관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고 여기저기 놔두니 집 안이 온통 찢은 책투성이. 아내가 좋아할 리 없다. 그리고 나는 공부를 핑계로 책을 좀 많이 사는 편이다. 중국어 관련 책만 100권도 넘게 샀고, 일본어도 50권 이상 샀다. 그걸 다 찢어 사방에 놔두니 - 언제든 볼 수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 집 안이 엉망이다. 그래도 중국어 일본어 모두 목표 달성 - 1급 - 해서 다행이다. 두 언어 다 1급 따고 찢은 책들은 다 버렸다.



6. 비행에서의 일본어 활약기


중국어와 마찬가지로 일본어를 할 줄 알면 비행에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팀원들이 일본 승객에게 실수를 저질렀을 때 일본어로 사과를 했다.


"팀원이 실수로 손님의 바지에 물을 쏟았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세탁비를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乗務員が誤ってお客様のズボンに水を注いだと聞きました。申し訳ありません。クリーニング代を用意することができます。よろしいですか)


"팀원이 커피를 쏟았다고 들었습니다. 기내에 화상 연고가 있습니다.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신지요"

(乗務員がコーヒーを注いだと言われましだ。機内にやけど くすりがございます。医師の助けが必要ですか)


일본어는 사과하는 표현이 많다. 속 마음 (本音 Hon'ne)와 겉 마음 (建前 Tatemae)이 달라 승무원 앞에서는 괜찮다고 했는데 나중에 회사에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에 팀원들이 실수를 하면 (물론 내가 실수를 한 경우도 많다) "거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마음으로 내가 최종적으로 사과를 드렸다.


일본어는 경어가 복잡한 언어다. 경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으면 진짜로 일본어를 잘하는 거다. 규칙도 복잡한데 불규칙한 규칙은 사람을 더 헷갈리게 한다. 그래도 외국인이 일본어로 사과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해서인지 대부분 좋게 승무원의 실수를 너그럽게 넘어가 주셨다.




* 내가 외국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 그 나라 사람에게, 그 나라말로 대화를 하고 싶어서였다. 만국 공통어인 영어가 있다고는 하지만 영어가 안되는 사람이 더 많다. 내가 조금 더 다가가 그의 언어로 얘기하면, 조금 부족하더라도 나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세계의 모든 언어를 다 배워야 하지 않겠냐고? 가능만 하다면 그러고 싶다. 언어도 서비스고, 나는 서비스 하는 승무원이니깐 말이다. (캬! 결말이 스고이 데스네. 소우 데스네. 데쇼~)


* 원래 목표는 영어 토익 900점, 일본어 JPT 900점, 중국어 HSK 6급이 목표였는데 토익과 HSK 는 목표를 이뤘지만 JPT는 1급만 따고 900점 넘기는 건 (현재로써는) 포기했다. 대신 앞으로 말하기와 듣기, 읽기에 더 집중할 생각이다. 그래서 휴직 기간동안 6, 7, 8 세 달은 종로 가서 스크린 중국어를 듣고, 9월에 강남가서 최쌤의 스크린 일본어를 수강할 예정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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