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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동갈베도라치 머리엔 네비게이션이 있다

동네 지도를 몽땅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는 물고기

by 깅이와 바당

영화 <조수웅덩이 : 바다의 시작> 상영 후 관객과 대화 시간이나 조수웅덩이 관련 인터뷰에서 빠지지 않는 질문 중 하나가 조수웅덩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생물은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사실 딱히 어느 한 생물을 특별히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니어도 항상 앞동갈베도라치라고 대답하게 된다.



앞동갈베도라치Omobranchus elegans

영화 <조수웅덩이 : 바다의 시작> 상영 후 관객과 대화 시간이나 조수웅덩이 관련 인터뷰에서 빠지지 않는 질문 중 하나가 조수웅덩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생물은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사실 딱히 어느 한 생물을 특별히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니어도 항상 앞동갈베도라치라고 대답하게 된다. 앞동갈베도라치는 외모는 물론 습성도 재미있어 이야깃거리가 많다. 우선, 겉모습이 예쁘고 화려하다. 그래서 엘레강스라는 학명이 붙었다. 우리나라 전 연안에 살 만큼 흔한 물고기지만 여느 열대어 못지않은 색과 무늬를 지녔다. 길쭉한 몸매에 노란색 바탕 위로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진한 갈색 얼룩무늬가 있고 가는 몸에 비해서 폭이 넓은 등지느러미에는 파란 금속성 점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처음 나를 매료시킨 것은 큰뱀고둥Thylacodes adamsii 껍데기를 집으로 삼아 들락거리는 모습이었다. 큰 뱀고둥은 다른 고둥들과 다르게 꼭지(각정)가 뾰족한 원뿔형이 아닌 모기향처럼 납작하고 구불구불한 형태로 바위에 붙은 채로 사는 고둥이다. 큰뱀고둥 껍데기의 입 구멍(각구)은 보통 1cm 정도로 앞동갈베도라치가 들어가면 딱 맞는 크기이다. 앞동갈베도라치는 몸이 가늘고 길며 유연해서 큰뱀고둥 껍데기에 들어가기 최적화된 형태로 공진화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구멍에 들어가는 모습도 재미있다. 아주 급하게 숨을 땐 머리부터 들어가기도 하지만 보통은 꼬리부터 들어가는데 먼저 구멍 속을 한 번 눈으로 살펴보고 몸을 돌려 후진하는 습성이 있다. 가끔 잘 살펴보지 않고 후진하다 보면 엉뚱한 곳에다 몸을 들이미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후진 사고는 자연 상태에서 보다는 사육하며 관찰할 때 더 자주 볼 수 있는데 큰뱀고둥 대신 작은 유리병이나 파이프를 넣어줬을 때 발생하는 것 같다.

큰뱀고둥 껍데기에 둥지를 정한 앞동갈베도라치 수컷

들어가기 전 구멍 속을 들여다보는 행동은 단순히 위치만 파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잠깐 집을 비운 사이 다른 침입자가 있는지 점검하는 행동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안전한 곳에 자리 잡은 쾌적한 구조의 집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여 좋은 집을 차지하고 암컷을 맞이해야 하는 앞동갈베도라치 수컷들 사이에는 치열한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몰래 들어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무턱대고 후진하다가 꼬리를 물어 뜯기기라도 하면 낭패이니 조심해야 한다. 앞동갈베도라치는 육식성이며 이빨이 아주 날카로워서 맨손으로 잡다가 물리면 피가 날 수도 있다.


수컷은 번식기에 색이 짙어진다. 여름철 큰뱀고둥 둥지 구멍 밖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있는 수컷 앞동갈베도라치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암컷을 기다리는 중이다. 주변에 암컷이 나타나면 수컷은 집에서 나와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지느러미를 활짝 펼친 채 격렬한 구애의 춤을 춘다. 한 번씩 땅을 구른 후 빠르게 원을 그리며 암컷이 관심을 보일 때까지 집 앞을 뱅글뱅글 여러 번 돈다. 암컷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엔 옆집 수컷이 도전한다. 결국 암컷은 옆집으로 들어간다. 수컷의 춤 실력이 좋았거나 집이 더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암컷은 큰뱀고둥 껍데기 너무 깊숙한 곳이 아니라 입구에서 가까운 쪽에 알을 낳는다. 산소 공급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밖에서 기다리던 수컷은 적당한 때에 꼬리부터 몸의 반 정도 들어가서 가슴지느러미를 부지런히 흔들어 앞뒤로 움직이며 골고루 정액을 뿌린다. 산란은 힘든 일이라 중간에 잠깐씩 휴식을 취하는데 둥지 밖에 나온 수컷과 둥지 안의 암컷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눈을 마주치는 모습을 보면 이것이 사랑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큰뱀고둥 껍데기에 산란 중인 앞동갈베도라치 암컷(위), 볼을 비비며 애정을 표현하는 수컷(아래)

앞동갈베도라치는 같은 청베도라치과의 물고기인 저울베도라치나 대강베도라치와 마찬가지로 알을 낳은 암컷은 떠나고 수컷이 홀로 알이 부화할 때까지 지킨다. 그런데 조간대 바위벽에 붙은 큰뱀고둥 껍데기를 둥지로 삼으면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바로 썰물이다. 지역에 따라 다양한 상황이 생기는데 특히 성산 수마포 조간대의 앞동갈베도라치들은 이상하게 물 밖에 드러나는 시간이 긴 조간대 중상부에 둥지를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수간만 주기에 따라 길게는 서너 시간을 물 밖에서 버텨야 하는데 여름철 뙤약볕 아래 좁은 고둥 껍데기 속에 갇힌 수컷은 자신도 생존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알을 지켜야 한다. 다행스럽게 큰뱀고둥은 구불구불해서 껍데기 안쪽에는 물이 고여 있다. 수컷은 구멍 속을 오르내리며 알에 그 물로 알을 적셔 마르지 않도록 고군분투한다. 난 이런 장면을 목격하고 두 가지가 궁금했다. 만약 물고기에게 부성애라는 고차원적 의식이 있다고 할지라도 물고기가 자신의 의지로 물밖에서 숨을 참는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또 하나는 늘 조수간만이라는 환경을 접하며 사는 조간대 물고기가 굳이 물이 빠지면 공기 중에 노출되는 곳에다 둥지를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물기가 있다고는 해도 몸이 살짝 젖는 정도로는 물고기가 호흡하긴 어려울 것이다. 아직 앞동갈베도라치의 이런 습성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관련된 연구도 없는 듯하다. 우리나라에는 살지 않지만, 일본 남부나 동남아 그리고 호주에는 짱뚱어나 말뚝망둥어처럼 물 밖에 기어 다니는 청베도라치과 물고기가 몇 종 있다. 앞동갈베도라치도 이들처럼 물밖에서 오래 견딜 수 있는 피부호흡 또는 창자 호흡 같은 능력을 갖추지 않았을까?

썰물 때 공기 중에 드러난 앞동갈베도라치의 둥지(고둥 껍데기 안에 알이 보이고 알을 지키는 수컷은 헐떡 거린다

또 하나 이들이 이런 위치의 둥지를 선택한 이유는 앞동갈베도라치와 모양이 잘 맞는 큰뱀고둥이 이런 장소를 좋아해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공기 중에 노출되는 위치의 장점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면 알을 먹으려고 노리는 포식자의 접근이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알이 부화할 때 수면에서 출렁이는 파도를 이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청베도라치과 물고기 중 두줄베도라치Petroscirtes breviceps는 특이하게 고정되지 않은 물체를 둥지로 이용한다. 자연적으로는 보통 소라 껍데기에 알을 낳지만, 빈 병이나 파이프 같은 인공물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집에 대한 욕심인지 호기심인지 모르겠으나 뭐든 들어갈 수 있는 것이면 일단 들어가 보는 습성이 있다. 장난삼아 신발을 벗어 놓거나 손으로 구멍 모양을 만들고 기다려도 그 안으로 쏘옥 들어간다. 두줄베도라치가 이런 불안정해 보이는 곳에다 알을 낳는 이유는 좀 더 명확해 보인다. 알을 지키고 있는 두줄베도라치를 여러 번 촬영했는데 촬영하다 보면 아무래도 둥지(유리병, 플라스틱 파이프, 소라 껍데기 가장 최근엔 캔커피통)를 건드리게 된다. 그러면 그 순간 새끼들이 알에서 튀어나오는 모습이 카메라에 촬영된 경우가 많았다. 두줄베도라치는 부화를 촉진하기 위해 흔들리는 물체에 알을 낳는다고 생각된다. 이런 사례에 비추어보면 앞동갈베도라치의 선택도 충분히 그와 같은 이유가 있을 법도 하지만 더 많은 관찰과 실험이 없이는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모든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앞동갈베도라치의 행동에 대해 정말 놀란 경험이 있다. 내가 제작한 영화 <조수웅덩이 : 바다의 시작>의 영상과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KBS의 <풍덩 달의 정원으로>라는 프로그램 촬영 중 내가 어포기에 잡힌 조수웅덩이의 생물들을 정일우 배우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중 앞동갈베도라치를 정일우씨가 손에 담아 물에 놓아주자 쏜살같이 자기 둥지로 찾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놓아준 곳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3m 정도에 아주 얕은 곳이며 지형이 울퉁불퉁하여 먼 곳까지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즉 앞동갈베도라치가 자기 집과 지금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둥지 안의 앞동갈베도라치를 꺼내 둥지가 안보이는 곳에 풀어주면 바로 집을 행해 달려간다(KBS환경스페셜 아이 엠 피시)

난 KBS환경스페셜 <아이 엠 피시>를 촬영하며 앞동갈베도라치의 공간 인지 능력을 검증했다. 미안하지만 조수웅덩이에 둥지에 자리 잡은 수컷을 잡아 집에서 먼 곳에 풀어주기를 반복했다. 거리에도 변화를 주었고 직선, 곡선 등 여러 조건을 바꿔 보아도 앞동갈베도라치는 별로 헤매는 일 없이 바로 집을 찾아갔다. 멀게는 6m 정도 떨어진 곳에서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손가락 크기의 물고기에게 6m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연어는 후각으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찾아온다고 하지만 앞동갈베도라치는 냄새를 맡거나 다른 방법을 동원할 여지도 없이 아주 빠르게 집을 찾아갔다. 그냥 그 지역 전체의 지도를 머릿속에 넣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물고기 전문가 황선도박사님은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라는 책을 썼는데 앞동갈베도라치 머리엔 네비게이션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https://youtu.be/Mgy-bju2Zqw?si=ymDteD0jHzTd9zs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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