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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에 나오는 바닷가

촬영지도 보고 생물도 관찰하고

by 깅이와 바당

제주에 오래 살다 보니 눈앞에 보이는 자연이나 풍광을 그냥 현상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런 모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그 안에 담긴 수없이 많은 이야기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에 사는 나의 삶까지 그 안에 포함하여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도리 해안도로 내만 염습지


차가운 수온 때문에 움츠렸던 생물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이때, 나도 촬영과 관찰을 시작했다. 이번 봄의 바닷가 생태 달력은 예년에 비해 거의 한 달은 늦는 것 같다. 육상은 이미 벚꽃이며 개나리며 봄잔치가 한창이지만 원래 바다의 계절은 한 박자 느리기 마련인데 올해는 유독 더 늦는다. 지난해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 탓인지 아니면 유난히 춥고 길었던 겨울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바닷가를 가보아도 기어 다니는 것들이 별로 없고 조수웅덩이에 작은 물고기들도 보이지 않는다.


칠게의 눈


며칠 전 게들의 상태가 궁금해 가까운 바닷가를 찾았다. 움직이는 것은 멀리 얕은 물웅덩이 수면 위로 빼꼼 나온 칠게의 눈뿐이었고 다른 게들은 흔적만 보일뿐 활동을 하지 않았다.


몸에 검은 칠을 한 칠게


질척한 갯벌을 좋아하는 칠게는 서해안에서는 아주 흔한 종이지만 제주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게다. 달랑게와 친척이면서도 건조한 모래를 좋아하는 달랑게와 달리 늘 젖어있어야 하며 살짝 물에 잠긴 상태에서 활발하다. 몸통은 납작하고 좌우로 길쭉한 편이고 눈자루가 가늘고 길어 굴이나 물속에서 잠망경처럼 눈만 위로 내놓고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재밌다. 몸에 진흙을 묻히고 있어 칠게라고 부른다는 말을 고창에서 들었다.


제주도의 경우 자연스러운 해안에는 칠게의 서식지가 많지 않고 대부분 해안도로나 둑으로 막힌 인공 석호에 퇴적물이 쌓여 펄갯벌이 된 곳에 살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성산읍 오조리이고 하도리를 비롯한 제주 동북부의 해안도로 내만 쪽 염습지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제주도에서 칠게를 발견한 곳 중 인공적인 환경이 아닌 곳은 유일하게 김녕읍의 덩개해안이다.

덩개해안 튜물러스


이곳은 화산활동이 한창이던 시절 흐르던 용암이 어딘가에 막혀 멈추면 아래쪽 용암이 위쪽 식은 용암을 밀어내어 빵이 부풀듯 위로 봉긋하게 올라온 지형인 튜물러스가 발달한 대표적인 장소이다. 그래서 덩개해안은 제주 지질트레일의 주요 코스이기도 하다. 그런 지형의 영향으로 높고 긴 형태의 자연 둑이 만들어져 그 안쪽에 다양한 생물 서식 환경이 조성되었다. 가장 낮은 곳엔 커다란 조수웅덩이가 그리고 그 가장자리엔 질퍽한 갯벌이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엔 모래가 쌓였다. 조수웅덩이 주변 바위지대에는 해양보호생물인 두이빨사각게가 사는데 제주도 어느 지역보다도 숫자가 많다. 그리고 질척한 갯벌엔 칠게가 살고 모래가 쌓인 곳 중 수분이 많은 중앙부엔 엽낭게가 건조한 가장자리엔 달랑게가 산다.


최근 제주를 배경으로 하는 화재의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첫회에 주인공이 등장하고 해녀들이 물질하는 곳이 바로 덩개해안이며 주요 장면에 여러 번 나왔다. 그 외에도 내가 잘 아는 장소들이 꽤 있었는데 며칠 전 칠게를 촬영한 하도리 토끼섬 앞 해안도로도 드라마 후반부에 두어 번 보였다.

덩개해안에서 톳을 채취하는 주민


제주에 오래 살다 보니 눈앞의 자연이나 풍광을 그냥 지금 형태로만 보지 않고 이런 모습에 이르기까지의 세월과 그 안에 담긴 수없이 많은 이야기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에 사는 나의 삶까지 그 안에 포함하여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드라마에 나온 장소들에는 작가의 상상 속 허구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단함이 스며있고 그보다 오랫동안 삶을 이어온 생물들의 이야기가 있다.




*제주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볼 때 제주 사람들에게 거슬리는 것 중 하나가 어색한 사투리이다.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은 전혀 다른 뜻으로 읽혀 재미있지만 실제 발음은 "복삭 소가수다."이다.

또 극중 많이 등장하는 꽁치, 조기, 오징어(살오징어)는 모두 제주도의 주요 수산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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