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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바다엔 게가 없었다

촬영 꽝친 이야기

by 깅이와 바당

머릿속엔 장치를 만들고 갑오징어를 사고 타임랩스를 촬영한 과정이 떠올랐다. '아! 이대로 하루를 공쳤구나' 내가 궤도에 오른 유튜버라면 이런 과정도 얘깃거리가 되겠지만 아직 그럴 수 있는 짬밥이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기초는 항상 완성도가 중요하다.



깅이와 바당 유튜브 채널에 새로운 카테고리를 추가할 계획인데, 아직 이름은 확정하지 못했지만 전문 용어로 BRUVS(Baited Remote Underwater Video Station)라는 것을 도입하려고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미끼를 바닷속에 넣고 그것에 이끌려 나타나는 생물을 카메라로 촬영하는 장치이다.

리그.png 방형구를 이용해 만든 카메라 리그


장치를 새로 제작할까 하다가 그전에 빛조개를 조사하기 위해 PVC파이프로 만들었던 방형구(생물의 서식 밀도를 측정하는 일정 규격의 정사각형 틀)를 이용하기로 했다. 전체 상황을 촬영하는 고프로와 딱 미끼 주변만 크게 촬영하도록 접사 렌즈를 부착한 에이스프로(액션캠 종류) 그리고 수중 조명을 장착했다.

화면 캡처 2025-05-23 161135.png 세화 오일장, 하필 빨간색 유세 차량이 와 있다
화면 캡처 2025-05-23 161347.png 꽤 비싼 갑오징어


미끼는 갑오징어를 사용했는데 재미와 이야깃거리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세화오일장 풍광과 오징어를 사는 과정도 촬영했다. 난 의외로 수줍음이 많아 30년 넘는 경력이 무색하게 미리 섭외하지 않은 사람을 촬영하는 것이 여전히 미안하고 어렵다.


오늘 촬영할 목표 생물은 깨다시꽃게다. 깨다시꽃게는 모래해안 조하대에 산다. 조하대는 썰물에 물이 빠져나갔을 때 뭍으로 드러나지 않고 살짝 잠겨있는 위치의 바다를 뜻한다. 전에 세화항 방파제 옆에서 게 낚시를 몇 번 해봤는데 꽤 쉽게 여러 마리가 잡혀서 게들이 미끼에 떼로 달려들어 뜯어 먹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20250520_183550.jpg 3초 당 한 컷, 30장이 모여야 1초 영상이 되므로 1분 30초가 1초로 압축된다


모든 촬영 준비를 마치고 우선, 해가 지고 바닷가가 어두워지는 과정을 타임랩스로 촬영했다. 처음엔 석양이 좋지 않을 것 같아 해와 반대편 하늘을 3초당 1컷으로 촬영했는데 돌아보니 하늘이 꽤 붉게 보여서 카메라를 돌려 초당 1컷으로 촬영했다.

화면 캡처 2025-05-23 162528.png 아까운 갑오징어


완전히 어두워진 후 드라이슈트를 입고 물속에 갑오징어 미끼를 묶은 BRUVS를 설치하고 난 주변을 탐색했다. 바닥에 곤쟁이는 쫙 깔렸지만 그것을 사냥하는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수온이 아직 찬 것일까? 해수온은 섭씨 18도 전후로 아주 차갑진 않았지만 현재의 해수온보다 최근 평균적인 해수온이 계속 낮았던 것이 생태엔 더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화면 캡처 2025-05-23 162619.png 야간 수중 촬영
제목 없음-2.jpg 모래에 숨은 흑대기


모래 바닥에 신발 자국 같은 것이 보인다. 내가 지나온 길도 아닌데...

가까이 가서 보니 발자국 위에 두 눈이 반짝인다. 흑대기다. 흑대기란 이름은 낯설겠지만 흔히 서대라는 생선은 몇 번 먹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가자미나 넙치처럼 납작하고 얼굴이 한쪽으로 쏠려있는 물고기인데 이 서대류는 가자미, 넙치만큼 물고기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그저 납작 길쭉한 신발 바닥 같이 생겼다. 흑대기는 참서대과의 물고기이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는 바닷가에서 잡아먹기도 했는데 꾸덕꾸덕 말리지 않으면 살이 무르고 맛도 별로라 귀찮아서 안 잡는다. 여기저기서 흑대기 몇 마리를 더 만났는데 하필 카메라 모니터 연결이 오류가 생겨 안정되게 촬영을 못했다.

복섬.jpg 유난히 도발적이던 복섬


장치에 게가 나타났을까 궁금해서 돌아가는 중에 꽤 큰 복섬 한 마리가 나타나 길을 막는다. 왜 오밤중에 조명을 켜고 물 휘저으며 다니냐고 항의하는 듯 카메라를 머리로 들이박는다. 복섬을 물리치고 가보니 장치 앞엔 놀라 도망가는 흑대기와 바닥에 깔린 곤쟁이 외엔 갑오징어를 노리고 나타난 게나 물고기가 전혀 없었다.


머릿속엔 장치를 만들고 갑오징어를 사고 타임랩스를 촬영한 과정이 떠올랐다. '아! 이대로 하루를 공쳤구나' 내가 궤도에 오른 유튜버라면 이런 과정도 얘깃거리가 되겠지만 아직 그럴 수 있는 짬밥이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기초는 항상 완성도가 중요하다.


몇 가지 아이템이 더 있지만 어느 하나 쉽지 않다. 오늘 계획한 달랑게 촬영은 갑자기 추워지고 바람 부는 날씨 탓에 또 미뤄졌다. 결국 있는 자료로 쇼츠 하나 올리고 성과 없이 버린 갑오징어가 아까워 브런치에 재활용한다.


https://youtube.com/shorts/dcw2ND60mSI?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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