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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들어왔져

길 잃은 멸치 떼

by 깅이와 바당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 것은 자연계에선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특히 조간대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다.



봄이 서서히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 제주 바다엔 멜 떼로 붐빈다. 바닷가에 멜 떼가 가득하면 처음 발견한 사람들은 큰 소리로 "멜 들어왔져"라고 외쳐 마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사람들은 멜을 뜰 수 있는 다양한 도구를 가지고 나와 멜을 퍼낸다.


멜은 제주말로 멸치를 뜻한다. 하지만 멸치Engraulis japonicus뿐 아니라 샛줄멸Spratelloides gracilis, 은줄멸Hypoatherina tsurugae, 밀멸Atherion elymus처럼 비슷한 크기와 외형을 지닌 여러 종의 물고기도 멜에 포함한다. 그중 멸치를 참멜이라고 하고 샛줄멸을 꽃멜이라고 한다.

제주시 해안도로변 웅덩이에 갇힌 멸치 떼


마치 개울에 사는 작은 물고기를 송사리나 피라미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 오일장에서 멜이라고 담아놓은 바구니를 살펴보면, 멸치와 샛줄멸은 물론이고 어린 정어리까지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이 빠지자 말라죽은 멸치들

멜들은 먹이를 찾기 위해 또는 포식자를 피하려고 얕은 바다 가장자리로 나와 몰려다닌다. 조간대에는 큰 포식자가 상대적으로 적어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한다. 그러나 때때로, 떼 지어 이동하다 보면 복잡한 지형에 길을 잃고 말곤 한다. 제주도의 암반 조간대는 특히 나갈 길을 찾기 어려운 곳이 많아, 미처 빠져나가기 전에 썰물이 되면 멜들은 바위 사이나 웅덩이에 갇혀 버린다. 이를 이용해 인공적으로 만든 웅덩이에서 갇힌 물고기를 잡는 전통어로 방식도 있다. 서해에서의 독살, 남해에서의 석방렴이라 하고 제주에서는 원담이라 불리는 돌그물이다. 현재는 대부분 멸치를 먼바다에서 대규모로 잡기 때문에, 이 돌그물은 주로 흔적만 남았거나 체험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서귀포 보목리의 소천지같이 큰 웅덩이에 갇히면 몇 시간 후 다시 밀물이 들어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경우는 웅덩이의 물이 모두 빠져 바싹 말라버리기도 한다. 멜이라 불리는 물고기들은 활발히 움직이며 호흡해야 하고 수온 변화에 대한 내성도 약하다. 그래서 좁은 곳에 갇힌 멜들은 대부분 오래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


웅덩이에 갇힌 멜을 노리는 흑로

갯바위 위에서 반짝이는 멸치 비늘이 높이 날던 새들의 눈에 띄었나 보다. 어느새 흑로Egretta sacra가 내려앉아 웅덩이 안에서 우왕좌왕하는 멸치들을 긴 부리로 콕콕 집어낸다.

밖의 소란스러움을 감지한 무늬발게Hemigrapsus sanguineus가 바위 구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집게가 두툼한 수컷이다. 바로 구멍 옆에 쌓여있는 진수성찬을 보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라는 듯 집게발로 눈을 쓰윽 문지르자 눈자루가 접혔다가 펴진다. 무늬발게는 집게발로 멸치 한 마리를 집어 들고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횡재한 무늬발게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 경우는 자연계에선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특히 조간대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다. 이 틈에 흥미로운 장면을 포착한 나도 혜택을 입은 쪽이다.

웅덩이에 갇힌 멜을 촬영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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