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가장 가까워질때

눈오는 날 롤러코스터를 탄다면.

by butapples

추웠다, 정말로 추운 날씨였다.


눈조각들이 혈관 속에 피 대신 흐르며 살결을 구석구석 찌르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 고통은 더욱이 나의 생기가 다하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눈 앞에 도착한 열차는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을 터인데 전혀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곧장 초록색 안전장치가 열리고, 열차에 올라타며 손잡이를 쥐었다. 전진뿐만 아니라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이 정열적인 열차마저도 살얼음 같은 추위 견뎌낼 수는 없었음을 느꼈다. 게다가 추위는 특히 금속으로 이루어진 것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것이었다.


안내원의 설명과 함께 열차의 안전장치가 내려와 몸을 안겼다. 손잡이를 잡은 모습이 마치 어미에게 매달린 아기 같았다. 무언가에 안기는 것이 얼마 만이었던가, 그것이 안전바라 해도. 안내원의 설명은 나의 고막을 전혀 진동시키지 못하는 듯했다. 그 순간만큼은 유리 상자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유리 상자 속에서 나는 심장 소리와 침을 삼키는 소리 사이의 간격에 더욱 집중되었다. 안내원의 생명력 넘치는 작별 인사와 함께 열차는 노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긴 여행을 앞둔 것만 같았다. 열차의 마찰음과 열차를 향한 생명력이 가동되는 소리와 함께 열차는 전진하였다.


유리 상자 속에서 날 꺼낸 것은 눈송이였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저 먼 하늘에서 내려와 나의 흑색 정수리까지 도달하는 그 순간순간이 각각 눈 속에 적힌 수기를 읽는 듯했다. 이제 열차와 지면의 각도가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하더니 나의 눈은 하얀 하늘과 하이얀 눈으로 뒤덮였다. 가팔라진 경사 탓에 내리던 눈은 내 흑색 정수리가 아닌 내 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눈들과 더욱 가까워진 것 같아 내 뺨에 앉아 물로 되돌아가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더 소중해져 갔다. 열차는 하늘에 더욱 가까워질수록 우리를 하늘로 이끌어가는 것이 버거워 보였으나 어느새 놀이공원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을 나를 도달시켰다.


온 세상이 새하얗게 바래지고 있었다. 적어도 나의 눈 속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온 세상이 새하얗게 바래진 탓에 하늘과 지면의 경계조차 구분할 수 없어 하늘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세상이 꼭 평평하지마는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흰 눈송이들은 이런 하이얀 바탕에 입체감을 수놓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눈을 제일 먼저 맞이하는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열차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더니 내 몸은 강철같은 중력을 따라 지면으로 강하게 이끌어졌다. 하강의 지점이었다. 열차가 중력에 타올라 하강을 시작하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심장이었다.열차가 올라탄 강력한 중력에 빠져 심장의 시간선이 고무줄 늘어나듯 늘어났다. 느려진 시간과 함께 심장에 작용하던 중력은 역으로, 지구로부터 심장을 끌어 올려주어 잠시동안 내가 지구 외의 존재가 되도록 만들었다. 중력은 심장의 시간을 느리게도 하고 떠오르게도 했다.


열차가 강력한 속도로 하강하면서 하이얀 세상에 고르게 뿌려져 있던 찬 공기들을 강하게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찬 공기 탓에 데워진 두 뺨이었다. 내 뺨 사이에 두고 찬 공기와 힘겨루기를 하는 듯했다. 그러나 찬 공기를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찬 공기는 코를 타고 폐로 들어와 숨과 함께 온몸 구석구석에 냉기를 퍼뜨렸다. 이 냉기로 심장의 시간은 더더욱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열차는 마루와 골을 반복해 진동하더니 어느새 회전 구간에 다다랐다. 세상이 뒤집히고 있었다. 하늘의 위치에 지면이 자리하고 있었고 지면의 위치에 하늘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만 그 둘이 새하얗게 바래져 그 경계가 어디인지는 여전히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나는 하늘에도 있었고 지면에도 있었다.


눈송이들은 하늘에서 떠올라 지면을 향해 비상하고 있었다. 지면으로 떠올라 지면의 별이 되고 있었다. 그것이 지면을 향한다 해도 세상에 하얀 빛을 남긴다는 점에서 저 먼 하늘에 있는 별과 다른 점을 찾는 것은 의미 없는 일에 불과했다.


열차는 어느새 모든 구간을 지나쳐 긴 직선의 노선을 지나고 있었다. 그토록 보이지 않던 하늘과 지면의 경계와 같았다. 속도는 점차 줄어들었고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 숨을 고르는 소리, 찬 공기를 스치는 소리, 열차의 바퀴와 노선이 일으키는 파열음, 열차에게 생명력이 전해지는 소리….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소리가 한데 뒤섞여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냈다. 퍼즐간 서로의 그림이 맞지는 않지만 껴 맞춰지는 것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 퍼즐의 완성품은 하나의 레퀴엠을 만들어냈다. 다만 그 소리들 속에서 나의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추위에 노출된 탓이었는지 이제는 더 이상 추운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살점을 구석구석 찌르는 듯한 고통마저도 느껴지지 않았고, 이젠 이 추위마저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안내원의 생명력 넘치는 환영 인사가 들려왔다. 다만 출발하기 전보다 그 공간의 온도가 높아진 듯 느껴졌다. 차가웠던 손잡이도 이제는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탓에 이제야 손잡이의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주위에서 퍼져오는 숨결 하나하나가 가혹하게 느껴졌다. 나는 내 몸이 금속으로 바뀐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안내원은 열차에서 내려 출구로 나가는 관객들에게 악수를 해주었다. 누군가와 손을 겹쳐 서로의 생명력을 공유하는 일은 나에게 흔한 경험은 아니었기에 나름의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혹여나 나의 생명력이 다하지는 않았을까 걱정도 들었다.


나는 그 안내원의 생명력을 영원히 수신할 수 없었다.

영원히, 영원히…


어느새 나는 눈사람이 되어있었다.


24.09.06 / butapples


이 글의 시작은 한 유튜브 영상이었다. '티익스프레스'를 제작한 설계사 분이 자신이 설계한 놀이기구를 행복한 모습으로 설명하며 롤러코스터를 타고 계셨다. 그때 때마침 이런 생각이 났다. "눈 오는 날 롤러코스터를 타면 어떤 기분일까.", "눈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겠지?". 이런 상상들을 하며 썼던 글이었다. 이 글을 쓸 때는 나무가 푸릇하던 여름이었는데 벌써 어느 새 겨울이 와 눈이 내리고 있다. 오늘은 집을 나설 때 하늘이 흐리더니, 시험을 보고 나왔을 때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