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死漠)

by butapples


이 글은 어떠한 종교적 단체와 연관이 없으며 순수히 문학을 목적으로 작성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뒤를 돌아보니 붉은 모래 너머로 다시 붉은 모래가 이어졌다. 발 밑에서 아주 먼 곳까지 펼쳐진 붉은 모래의 연속은 그들 각각 고유의 위치로 수렴 하여 좌우로 끝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곡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곡선은 비로소 하늘의 가장 먼 곳과 맞닿아 있었다. 월광은 찬연했고, 바람결은 날카로웠다. 결 하나하나가 마치 장인이 공들여 세운 날 같아 피부를 정확히 한 겹 씩 도려내는 것 같았다. 바람결이 날카로운 탓에 바람을 등지고 나아가니 어느 새 붉은 모래 언덕 꼭대기에 다다랐다.


자색(紫色)과 청색(靑色)이 뒤섞이던 하늘, 그 밑 드넓게 자리한 것은 붉은 바다였다.


그날따라 찬연했던 달의 중력 탓인지 붉은 모래의 물결은 일렁거렸고 붉은 모래가 하늘과 닿을 듯 차오른 것을 보아 만조가 분명해 보였다. 저 멀리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는 붉은 모래 뿐이니 저 멀리 보이는 바위가 마치 세상의 중심인 것만 같았다. 바위 옆에 자리를 틀고 고요한 침묵과 함께 스며드는 밤을 맞이할 준비 하였다. 붉은 모래는 붉은색에 맞지 않게 차가움으로 가득 차, 세상에 붉은 얼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어느 새 바람결은 힘을 잃어 세상이 고요했 다. 하늘에서는 자리한 별들이 자신에게 담긴 밝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나를 향해 점점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느려진 사고회로 탓에 하루 간 느껴지지 않았던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나를 덮쳐 혈액을 타고 온몸에 스며들었다. 저 먼 발끝까지 피로가 퍼진 것을 느껴질 때즈음 의식은 붉은 모래 저 아래로 파고 들었다.


의식을 붉은 모래 위로 끌어 올린 것은 가벼운 깃털 하나였다. 하늘 저 멀리 날고 있는 까마귀를 보아하니, 코 끝에 놓인 흑색(黑色) 깃털은 저 까마귀의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고요한 사막에 오래 간 있었던 탓인지, 혹은 그동안 침묵에 계속해서 잠겨 있었던 탓인지 잠을 깨우기 위해서는 솜털 같은 깃털 하나면 충분했다. 예민해진 걸까, 아니면 마음의 수면이 더없이 고요해진 탓일까. 사실 둘 중 어떤 상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강렬한 광원이 하늘에 떠오른 탓에 모래의 색이 어젯밤 보다는 붉지 않았다. 간단히 짐을 챙겨 얼마 남지 않은 물을 입에 모두 털어놓고 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 가야 할 지 전혀 계획되지도 계획하지도 않았다. 다만 목적지와 그 목적지에서 해야 할 과업만은 정해 놓은 채로 깊은 내면의 무의식에 의존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바람은 어제와 다르게 솜털같이 온화하였다. 어젯밤 바람과 오늘의 바람이 만나면 어떤 바람이 이겨 온 세상을 뒤덮을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던 찰나 저 멀리서 진동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진동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붉은 모래사막에 흰 반점 몇 개가 찍혀 있는 듯 보였다. 어느 새 나는 그 진동을 따라 그곳을 향해 한 발자국 씩 내리기 시작했다.


그 진동의 원천은 코끼리 무리였다. 다만 그동안 알던 코끼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들의 가죽은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빛처럼 백색으로 빛나 고 있었고 상아는 깊은 우물의 입구 마냥 깊은 어둠을 띠며 온 세상의 빛을 모두 흡수하고 있었다. 그리곤 그와 반대로 이마 부분에 위치한 어떤 것으로부터 빛이 방출되는 듯 했다. 상아에서 빛을 흡수하는 것으로 시작해 이마 부분에서 방출되는 빛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순환의 흐름은 마치 코끼리 내부에 본능적으로 내제된 호흡과 같았다. 더욱 가까이 보고 싶었다. 이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이끌림은 인류에 내제된 본능과 같았다. 혹은 그것이 아니라면 그동안 이어온 자침(磁針)에 대한 자의적 부재로 인해 실증이 나버린 나머지 잠시동안 어떤 존재에게 종속되고 싶다는 원초적이고 가녀린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코끼리 무리를 향해 다가가보니 저 멀리서 보이던 흰 반점의 개수가 7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코끼리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거대하지는 않았다. 아마 어제 머물었던 바위 정도의 크기와 비슷해 보였다. 다만 비교적 조그마한 크기에 비해서 진동은 대지를 울렸다. 7마리의 코끼리가 각각 만들어 내는 진동은 불규칙했으나 세상을 매개로 펴지는 그 무리의 진동은 본래 하나의 진원에서 동시에 생겨난 듯 서로 공명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 먼 거리에서도 진동이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이마에서는 방출되는 빛은 이마에 위치한 녹색 원석에 태양빛이 반사되어 마치 빛이 방출되듯 보였다. 그것이 정말로 원석일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금으로서 원석이라는 단어를 제외하고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빛이 반사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것 내부의 끝없는 공허한 공간을 담은 듯한 깊이를 보아 생명체의 홍채에 더욱 가까운 모습이었다.

코끼리 무리를 뒤따라 걸었다. 어느 새 코끼리 무리의 땅울림 소리가 내 심장이 박동이라도 된 양 땅울림 소리에 적응하였고 그에 맞춰 내 심장소리 마저도 코끼리 무리의 공명을 강화시키는데 이바지 하고 있었다. 코끼리가 만드는 그늘 테두리 속에서 걷다 보니 서늘함이 코끝에서 시작해 혈관을 타고 발끝까지 펴졌다. 그러나 서늘함이 사고회로까지 닿기에는 모자른지 여전히 머리 한 구석이 꽉 막힌 듯 했다. 계속되는 걸음에 눈에 들어온 것은 코끼리가 가진 붓 같은 흰 꼬리였다. 그 꼬리는 코끼리가 일으키는 땅울림의 진동주기에 맞게 좌우로 진자 운동을 하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생각하던 찰나 하늘에서는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흰 눈이 내리고 있음에도 태양은 숨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이 흰 눈이 어젯밤 보았던 별에 담긴 밝음이 넘치고 넘쳐 그 밝음을 담을 곳이 부족해지자 결국 그 남아나는 밝음은 눈이 되어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햇빛은 눈 하나하나를 투과해 그 속에 담긴 밝음을 무지갯빛 형태로 고이 펼쳐내어 밝음의 각 원소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눈이 검은 모래에 닿는 순간, 눈은 담겨있던 밝음을 검은 모래에 풀어내며 하나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온 대지가 회색 점토로 물들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의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진 것이 의식되었다. 내 몸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내 사고회로에서 동작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오직 사고회로에서만 머물러,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사고회로 속에서만 의식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몸 대부분이 회색 점토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어느 새 얼굴만 밖으로 나와있었다. 목은 아직 움직일 수 있었기에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녹빛(綠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보다 청량했다. 태양이 잉태했던 여러 갈래의 빛이 그의 밖으로 나와 하늘을 지나고 청색(靑色) 구름 무리를 거치니 순백의 빛으로 빛났다. 그 빛은 아마도 세상이 창조됨과 동시에 태동한 태초의 빛이 틀림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본 빛이 무엇보다도 밝은 빛이기에 충분하였다. 내 몸이 모두 잠겼을 때 느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거울 너머에 세계가 있다면, 그 거울 세계와 현실 세계 중간에 거울 세계도 아니고 현실 세계도 아닌 그 형용할 수 없는 경계의 세계에 머무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변이 어둠이 의식되던 순간 문득 코끼리의 상아가 떠올랐다. 어디선가 진동소리가 들렸다.


회색 점토는 어느 새 다시 눈과 검은 모래로 분리되었다. 눈과 검은 모래는 어디선가 들리는 진동에 맞춰 겉 테두리는 원형의 수레바퀴 문양을, 그 속은 음양의 문양을 만들어 내며 빠르게 회전하였고 그들은 각각이 한데 뭉 쳐 나에게로 다가와 내 몸을 창조해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태초의 빛이 내 중심으로 빠르게 흡수되었고 태초의 빛이 밝게 빛나며 태초의 태동이 가진 고유의 진동수에 맞게 진동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진동에 집중하니 코끼리의 땅울림이 다시금 의식되었다.


어느 새 눈 앞에는 호수가 펼쳐져 있었고 코끼리 무리는 한데 모여 목을 축이고 있었다. 일단 나도 그 옆에 앉아 갈증이 났던 목부터 축였다. 호수에는 호수의 비친 붉은 사막이 이어져 있었다. 청색 호수, 붉은 사막, 그리고 다시 붉은 사막, 청색 호수. 하늘과 대지의 경계가 사라져 있었다. 하늘이 대지되기도 하고 대지가 하늘이 되기도 하였다. 목을 축이고 비로소 과업을 마무리하려 가방을 열었다. 가방에는 수레바퀴가 새겨진 작은 석함이 담겨있었다. 그 석함을 열어보니 연꽃씨앗 하나가 들어있었다. 그 연꽃씨앗을 조심스럽게 손에 움켜쥐고 두 손을 가슴에 공손히 모았다. 한 걸음, 한 걸음 호수 속으로 걸어갔다. 연꽃씨앗은 물과 만나니 빠른 속도로 발아하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 그리고 수많은 신체 기관들이 각각 연꽃의 줄기가 되고 뿌리가 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비로소 배꼽아래에 위치한 태초의 빛이 완벽한 구의 형태로 응집하여 줄기를 타고 수면위로 비상하였다.


붉은 사막의 호수에는 세상을 품을 듯한 연꽃 한 쌍이 활짝 피어났다.

그리고는 목을 모두 축인 6마리의 코끼리 무리는 또 다시 땅울림을 일으키며 앞으로 걸어갔다.


24.10.11 butapples.


이 글을 쓸 당시 ‘불교개론’이라는 수업을 들으며 불교의 문화와 상징에 대해 배우고 있었고, 이와 더불어 타이밍 좋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불교와 관련된 전시를 보고 난 뒤 영감을 받아 작성하였던 것 같다. 불교라는 종교는 참 신비롭기도 하고 한국인이라면 알 수 없게 이끌리는 듯한 느낌도 든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절에서 몇년간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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