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엔가 친구들과 왁자하게 수다를 떨고 집에 돌아왔다. 잘 들어갔냐며 한 친구에게서 조심스러운 문자메시지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OO야, 넌 정말 나중에 박스 줍는 노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상상해? 왜 그런 걱정을 해.” 아마 대화 도중에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나의 가장 큰 공포는 늙어서 몸도 불편한데 살기 위해 폐지 줍는 노인이 되는 거라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친구들도 공감하며 농담처럼 넘어갔는데, 이게 친구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날의 대화를 복기하는 친구의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응, 나는 그게 무서워. 혼자인 내 상황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까봐. 무엇보다 가난한 노인이 되는 게 무서워.”
귀여운 할머니
업무 특성상 다른 사람을 인터뷰로 만날 기회가 많다. “미래의 나의 모습을 어떻게 상상하느냐”는 진부한 질문을 던지면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자주 나오는 대답이 있다.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나이 들어서도 여행도 부지런히 다니고 내 일도 취미 생활도 열심히 하는, 감각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외국(아마도 서양권이겠지)에 나가면 만나는 패셔너블한 은발의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거다. 사실 이 “귀엽다”는 형용사는 여러 의미가 있다. 곱게 나이 들고 싶다, 내 주장만 내세우는 괴팍한 노인이 되지 않겠다, 도태하지 않고 열린 사고의 노인이 되고 싶다는. 그런데 그런 사람이 되려면 은퇴하지 않아도 되는 자기 일이 있는 것이 좋고, 젊은 연령대와 접점이 있는 환경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빈곤하지 않아야 한다.
최근 출간을 위해 회의를 하는데, 편집자가 뽑아 온 제목 후보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유주택무자식 할머니가 되고 싶어”. 위트와 방향성이 명확한 제목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자식 유무를 고민조차 해본 바가 없다. 집 또한 있으면 좋겠지만 그를 위해 어떤 노력도 해볼 엄두도 못 내고 있다. 결혼은커녕 자식을 낳을지 말지도 상상 안 해본 내게 그 제목은 너무 아득해 후보에서 제외. 재작년부터 출간된 ‘할머니’ 제목을 앞세운 책들과 시니어 유튜버들의 영상을 보고 나 또한 위로받았다. 꾸준히 공부하고 성장하는 그들을 보며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도전이 위로는 될지언정 선뜻 내게 대입되지는 않았다. 저분은 여유가 있으니까, 저분은 손녀가 있으니까…. 나는 저렇게 못 할 거야. 그러고 보니 한번도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지 꿈꿔본 적이 없었다.
나이란 숫자에 불과할까
비혼에 자식이 없어서 이런 공포를 가진 것일까. 무턱대고 미래를 비관하는 나쁜 습관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모든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것도 아니고 최근에는 비혼 여성들이 커뮤니티를 만들어 함께 사는 모습도 미디어에 자주 노출된다. 생애주기는 길어졌는데 은퇴 시기는 빨라져 불안한 시대에 고령화에 대한 콘텐츠가 소비되는 것이다.
내가 ‘귀엽다’고 생각한 여성 그룹은 엄마와 이웃 여성들이다. 밥집이 줄지어 있는 거리에서 식당을 하는 엄마 주변에는 온통 혼자 사는 중년 여성들이다. 누구는 남편이 먼저 죽었고, 누구는 이혼을 했다. 3년 전 아빠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엄마 역시 잠재적인 1인가구다. 엄마는 내가 뭘 사다 주면 이튿날 꼭 몇개 더 사 오라며 전화를 해온다. “니가 사다 준 냄새 나는 거(향낭을 사다 줬다) 옆집 아줌마가 자기도 열개 사다 달래, 앞집 아줌마는 다섯개.” 자식이 이런 걸 사다 줬다 자랑하다 보면 “자기도 우리 애한테 사다 달라고 할게”로 이어지는 것이다. 동치미를 담가 나눠 먹고, 서로의 음식을 뒤에서 품평하기도 하며 자녀에게 희소식이 있으면 질시와 축하가 섞인 이상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저게 칭찬인지 욕인지 선을 마구 넘나드는 60대 여성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귀여워 웃음이 난다.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엔
하지만 귀여움은 건강하고 여유가 있을 때나 발휘되는 성질이다. 얼마 전 무릎 수술을 받은 엄마는 실비보험을 한 푼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이때부터 엄마는 쾌활한 성품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가족에게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병간호를 도맡은 동생은 엄마 때문에 화병에 걸리겠다며 밤마다 혼자 주차장에 내려가 숨을 고르고 참을 인을 집어삼킨다. 무슨 놈의 치킨 메뉴조차 그렇게 길고 어려운지, 엄마는 혼자선 치킨도 시킬 수 없다고 투덜댄다. 내 몸을 내 맘대로 할 수 없으니 짜증스럽고, 그간 혼자 잘 헤쳐나왔던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서 허무하다. 보험만이 최고의 노후 대비라고 믿었지만 바보가 된 기분이고, 온 세상이 나를 속여 먹기 위해 돌아가는 것 같다. 노인이 되는 일은 그런 것이다. 여태 당연하게 살아온 세상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에 노인은 너무 느리고 천진하다. 무조건 엄마 편을 들며 보험사에 따지고, 동분서주하다 깨달았다. 엄마는 자식에게 짜증이라도 내지, 내가 나이 들었을 땐 누가 나를 돌봐주지?
문제가 생기면 나서줄 젊은 가족이 없다는 건 무서울 것 같아요, 친한 여성 선배에게 신세를 한탄했다. “엄마만 봐도 낯선 걸 물어볼 자식이 없는 건 무서운 일 같아요. 나이 들어도 디지털에 강한 사람이 돼야겠어. 근데 전 귀엽고 재밌는 할머니는 못 될 것 같아요. 그건 돈이 있어야 가능할 것 같아.” 다정하고 상냥한 나의 선배는 이렇게 답했다. “무슨 소리야. 우린 서로를 도울 거야. 너는 날 안 도울 거야? 난 너를 안 도울 것 같아? 재미있는 할머니 안 돼도 서로 도울 거야. 걱정하지 마.” 나를 돕겠다는 친절한 선배와 미래를 비관하는 내가 걱정돼 연락을 주는 친구가, 아직은 있다. 내가 너를 도울 거라는 선배의 말보다는 ‘너는 나를 안 도울 거야?’라는 반문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당연히 친구를 도울 거다. 처음으로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어졌다. 나는 곁에 있는 친구를 도울 수 있는 그런 노인이 되고 싶다.
* 이 글은 한겨레 토요판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