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사람을 못 보셨나요...손절 당한 관계에서
잘 쓰는 수필가는 필부에 불과한 자기 인생에서 사소한 깨침을 얻어 독자에게도 감동을 주는 글을 쓸 텐데, 그저 그런 필자에 불과한 나는 쓰다 보면 항상 나를 피해자나 약자 쪽에 두게 된다. 어떤 사건에서 내가 느낀, 불운하거나 억울한 감정들을 토로하다 보면 나의 피해자성이 짙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늘 피해만 당하고 선한 쪽에만 설 수 있겠는가. 누군가에게는 내가 불쾌함을 주는 쪽일 수 있고, 동료들에게는 얌체, 친구들에게는 무례한 말을 잘하는 친구이기도 했을 것이다.
만날 때마다 불쾌한 감정이 끈덕지게 따라붙게 만들어 ‘손절’을 한 친구가 있다. “앞으로 이런 걸 해보려 한다”고 계획을 말하면 “그거 내가 듣기로는 레드오션이라 해봤자 안 된다고 하던데. 시간 낭비 아냐?”라고 찬물 끼얹는 말을 해대고, 묻지도 않았는데 부정적인 사회 예측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제 깐에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 것 같지만, 결론은 ‘해봤자 안 될 거’라는 내용이다. 말이 많을수록 실수가 생기고 오해가 발생하기 쉽다는 것을 이 친구는 모르는 것 같다. 누군가의 친구나 연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피곤하거나 헛되게 여겨져선 안 된다. 만나고 돌아왔는데 “에이. 집에서 넷플릭스나 볼걸” 싶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손절의 대상이 되기 쉽다. 친구 관계에도 정리해고의 시기가 오고 그렇게 절친에게 손절을 당한 사람이 바로 나다.
편하고 오래된 친구니까…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거리를 둔 친구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나와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관계 또한 존재한다.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리고 잠수를 타는 친구들은 대개 여리고 내성적인 성품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은 ‘얘가 서운한가’ 하고 상대가 감지할 만한 그 어떤 신호조차 주지 않다가 불현듯 상대의 인생에서 사라져버린다. 일반적인 친구 관계에서는 답이 없으면 상대도 끈질기게 연락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관계는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그 친구들에게는 내가 ‘빌런’이었을 것이다. 만사에 냉소적으로 굴면서 타인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폄훼하고 뭐든지 아는 척하는 재수 없는 애. 더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친구는 나라는 사람을 자기 인생에서 빼내버린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쉽게 상처 주지 못한다. 오직 내가 사랑했던 사람만이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다. 서로 사랑하는 친구였기에 그는 상처받았을 것이고, 그에게 차단당해서 나 역시 상처받았다. 친구에게 상처를 줬을 때, 나는 회사에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친구를 만나도 경솔하게 대꾸하고 상대를 배려하지 못했다. 편하고 오래된 친구니까, 나를 오해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가까울수록 더 다정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잃어버린 친구는 중학교 2학년 때 한 반이 되며 친해졌고 20년 지기였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겼다. 그 애가 나를 왜 차단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끈질기게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 아마도 내 번호는 차단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를 복기하니 짐작 가는 바가 있지만 친구는 나에게 사과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때 그건 서운했다’고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나를 자기 인생에서 삭제해버린 것이다.
컵떡볶이를 먹으며 굴다리를 지나 함께 하교하던 길, 할 말이 넘쳐서 집에 가는 버스를 몇대나 보내고 그래도 아쉬워서 ‘나머지는 내일 얘기하자’며 인사했다. 어른이 되면 집을 탈출할 거라고 서로에게만 고백했던 집안 사정, 꼭 같은 고등학교에 가자고 강제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내가 빨간 머리 앤이면 친구는 다이애나였다. 드디어 나의 다이애나를 만났다고 생각했던 15살, 앤과 다이애나처럼 초록 정원도 아닌 회색빛 보도블록에서 양손을 마주 잡고 영원의 맹세를 강요했었다. 친구는 글 쓰는 것도 귀찮아했는데 당시 유행이라 교환일기도 같이 하자고 졸랐다. 나는 두장 가득 채워 쓰는데, 넌 왜 이렇게 짧게 쓰냐고 잔소리도 했다. 맙소사, 이 글을 쓰면 쓸수록 ‘얘가 나를 어떻게 20년이나 견뎌줬지?’ 싶다. 신기한 노릇이다.
우리의 계절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얼마 전, 연락이 끊겼지만 궁금한 또 다른 친구 세명에게 문자를 보냈다. 가을이라 쓸쓸했던 모양이다. 세명 중 두명이 반갑게 답장을 보내왔다. 그중 한명은 메신저 상태창을 보니 벌써 애가 둘인데, 또 한 아이를 임신해 배가 볼록하게 불러 있었다. 보고 싶다고 했더니 친구는 요즘 캠핑에 재미를 붙였다며 조만간 같이 캠핑을 가자고 응답했다. 연락이 끊겼던 동안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친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손을 덥석 잡아주었다.
어떤 일로 말미암아 멀어지거나 아예 끊기는 관계도 있고, 용기를 내 다시 이어지는 우정도 있다. 평소 같으면 화날 일도 아닌데, 서로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싸움이 더 커진다. 친구의 어떤 단점을 참을 수 없을 때도 있지만 또 그 사람만이 나에게 주는 어떤 감정은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그때의 감정으로 서로의 손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가족도 아니고 법적으로 맺어진 관계도 아니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안녕’ 할 수 있는 게 친구 관계다.
하지만 그와 인연이 끊겼다고 해서 우리가 같이 보냈던 좋은 날들이 영영 사라지는 건 아니다. 가장 서툴고 모자랐던 시절에 ‘너여도 괜찮다’고 편지 써주던 친구가 있어서 지금 그나마 사람 구실 하며 살고 있다. 평생 함께 갈 사이란 게 있다면 아마 너와 나일 거라고, 건방지게 다짐했지만 우리는 우연이 작용하지 않으면 다신 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친구에게 다이애나가 되어줄 생각은 하지 못하고 ‘나는 앤이고 너는 다이애나’라고 역할을 정했던 것부터가 틀려먹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이 관계에도 계절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사그라들고 또 다른 시절이 찾아온다. 함께했던 봄과 여름에 내가 못되게 굴어서 미안. 이젠 더 조심하고, 잘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 우리의 계절은 다시 오지 않겠지. 너의 인생에 악당으로 남아서 미안. 잘 지내. 나의 앤.
늘그니
한겨레 토요판 '이런홀로'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