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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송희 Jan 14. 2022

  언플러그드 보이와 원표와 김삼순

30대 때 엄마는…90년대 드라마 속 주인공은…

일러스트 조예람

통신사나 온라인 쇼핑몰 광고나 새로 런칭한 패션 어플리케이션 광고마다 나오는 Z세대의 풍경이란, 길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머리를 땋고 통이 넓은 바지나 컬러풀한 옷을 입고 자유롭게 힙합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같은데, 맙소사...그건 90년대 천계영 만화 <언플러그드 보이>(1996)에도 나온 모습이잖아요. 패션은 돌고 돈다더니, 90년대 유행했던 크롭탑이나 통이 넓은 바지 등이 다시 유행한다는 내용은 패션 잡지에도 나오더라.

90년대 당시 천계영이 표현한 10대 '얼짱' 현겸이의 옷차림을 보면, 지금 광고 속에 나오는 Z세대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난 슬플 땐 힙합을 춘”다던 현겸이가 96년에 17살이었다고 가정해보면, 지금은 44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여전히 소년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만년 순수 청년일 것 같던 현겸이도 똑같이 나이를 먹고 취업을 하거나 가게를 열어 장사를 하고 있을까. 코로나19 때문에 자영업의 위기를 겪으며 애면글면하진 않을까. 순정만화의 환상을 깨는 소리는 일단 접어두고, 어찌 되었든 그 시절에도 요즘 애들 같지 않았던 만화책 주인공이니 지금도 자유롭고 즐겁게 살고 있기만을 소망해본다.

<요즘 애들>의 저자 앤 헬렌 피터슨은 요즘 애들,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기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고 배우며 자랐지만,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부모 세대보다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불안과 불만을 품게 된다고. '우리는 대공황 이래 처음으로 다수가 부모보다 못살게 되는 세대다.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던 계층 상향 이동의 경향이, 우리의 생애 주기상 경제적으로 가장 주요한 시기에 하필 제자리로 돌아갔다. (중략)우리 중 가장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으며 중산층은 자리를 지키느라 애면글면하고 있다.(24-25쪽, <요즘 애들> 중)

이따금 내가 얼마나 이 나이 대비 철이 없는지를 과거 드라마를 보거나 내 나이 때 엄마를 떠올리며 절감한다. 내 나이에 우리 엄마는 이미 초등학생 아이의 엄마였고, 이 가난한 살림에 애 둘을 어떻게 키워낼지 고민하던 생활력 강한 여성이었다. 엄마는 단칸방에서 연년생 딸 아이 둘을 키우며 의지 안 되는 남편 대신 얘들을 어떻게 부양할지를 고민했다. 넉넉치 않은 살림에도 철마다 새 옷을 입혀주려 저렴한 실을 구해 쉐타를 떠입히고 여유있는 친구 집에 가서 그 집 딸이 더는 안 입는 투피스 아동복을 얻어와 수선해 입혔다. 때마다 시장에 나가 세일하는 공단 구두를 사 신겼다. 그땐 그게 얼마나 품이 드는 일인지 몰라 목이 까스럽다며 직접 뜬 쉐타를 절대 안 입으려 떼썼다. 지금 나는 겨우 고양이 한 마리 책임지는 것도 어려운데, 우리 엄마는 두 아이를 키우고 밥 해먹이고 옷 해입히고 보험 판매 알바까지 했다니. 그러고 보면 애를 키우며 집 장만을 목표로 60만원 남짓의 아빠 월급으로 생활하던 엄마는 자신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30대의 엄마와 내가 가장 다른 점이란 엄마는 타인(자식)을 위해 살았고 나는 지금 온전히 내 욕망에만 충실해 살고 있다는 것의 차이다. 90년대 드라마와 비교해보면 나의 이기성은 더 두드라진다.


책임감의 나이

내가 요즘 푹 빠져 있는 드라마 <산다는 것은>(1993)의 주인공 원표(원미경)는 중학생 때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세 명의 동생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동생 셋은 큰 집에 맡겨두고 본인은 10대 때부터 남의 집 가정부를 해 악착같이 기술을 배우고 돈을 모아 동생 셋을 부양한다.

물론 ‘산다는 것’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예측대로 풀리는 게 아닌지라 원표네 기사식당에 갑자기 불이 나 건물이 홀랑 다 타버리고 원표는 건물 주인에게 빚을 갚으며 새로운 냉면 장사까지 시작한다. 남편이 사업을 부도내고 미국으로 도망갔는데도 여전히 부자 오빠 덕을 보며 편히 살 궁리만 하는 사촌 언니에게 원표는 이렇게 일갈한다. “편하고 싶은 생각 하면 할  수록 하루하루 넘기기 힘들어. 물론 고단한 거 싫지 누구나. 하지만 안 고단하게 사는 사람 몇이나 돼. 넥타이를 매고 회사를 가든 밥장사를 하든 뭘 하든 암튼 먹고 사는 일은 고단한 거야. 그게 사는 건데 어뜩해. 그러니까 우선 고단한 거 싫단 생각을 하지 말어. 그런 생각 하는 대신, 오냐 그래 아무리 고단해도 일거리만 있고 몸만 건강해라. 그럼 어느 날 살날 있을 거다.”

교훈 어린 대사만 받아 적어도 눈치챈 독자도 있겠지만, 이 드라마는 김수현 작가의 작품이다. 전반적으로 대사가 길고 말이 많은 김수현표 드라마는 불우한 환경에서도 요행수 바라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서민들에 대한 찬가가 많다. 오랫동안 식당을 했던 엄마 때문인지, 나는 원표가 음식 장사를 하며 종일 고단하게 일하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저렇게 맞는 말만 해대는 게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드라마 <아줌마>의 배우 원미경이 주인공이라서, 혹은 원표가 저렇게 온 가족을 책임지고 제 앞가림도 똑부러지게 잘 하는 사람이라서. 나는 당연히 이 주인공이 40대쯤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결혼을 안 한 원표를 불쌍해하는 친척 어른들은 “쟤한테 재취 자리 아니고 멀쩡한 신랑감 차례가 돌아오겠느냐.”며 “시집이라도 가야 나중에 제삿밥 차려줄 자식이 있지 않겠냐”고 잔소리를 얹는다.


놀라지 마시라. 극 중 원표의 나이는 알고 보니 서른다섯밖에 되질 않았다! 그러고 보면 93년도 드라마까지 갈 필요도 없다. 파리 유학까지 다녀온 파티시에이자 전문직 여성임에도 ‘나이 많은 노처녀’ 취급을 받던 <내 이름은 김삼순>의 삼순이도 겨우 서른 살밖에 되질 않았다. 김삼순의 당시 캐릭터 설명을 살펴보면 “30세, 오지랖 많고 뚱뚱하고 콤플렉스 많은 노처녀. 이름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해 김희진으로 개명하고 싶어 한다”라고 써 있다. 다시 봐도 어디가 뚱뚱하다는 건지, 겨우 서른에 노처녀라고 엄마를 비롯한 온 가족에게 구박받을 일인지, 그저 주변 사람에게 친근하고 성격이 좋을 뿐인데 그걸 오지랖이라고 하는 것부터가 이 시놉시스에서 소개하는 여자 주인공이 우리가 아는 김삼순이 맞나 싶다.

김삼순보다도, 무려 원표보다도 나이가 많지만 동생들을 시집, 장가 보내기는커녕 동생 이사갈  수건    못난 장녀는 내가 과연  나이에 맞는 처신을 하며 살고 있는지 부끄러워질 뿐이다. 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나는 어릴 때부터 똑같이 용돈을 받으면 금방  써버리고, 해야  숙제는 미루고 미루다 잊어 버리는 언니였다고 한다. <요즘 애들> 세대론을 얘기하듯 내가 그저 엄마 세대에 비해 계층 이동을 꿈꿔볼  없는 불공정한 시대에 살고 있어서 엄마처럼 책임감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고 싶다. 서른에 노처녀 소리 듣던 삼순이는 누가 뭐래든 자기 일에 있어서만큼은 자부심이 있었고, 원표도 서른 다섯에 벌써 대형 냉면집 사장님인데 나는  하고 있는 걸까. 뭐든지 미루지 않고,  몫을 해치우고 남의 짐까지 대신 지는 서른 다섯의 원표에게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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