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래서 미국 어디를 갔느냐고? 맞다. 미국은 아주 넓다. 그냥 아메리카라고만 하면 그게 동부인지 서부인지, 뉴욕인지 워싱턴인지 알 도리가 없다. 경유 시간 빼고 꼬박 열두 시간을 비행해 내가 도착한 곳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이었다.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 LA로 들어가 LA에 3박 4일,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국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 2박 3일, 여기서 기차와 버스를 타고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1박 2일, 여기서 다시 LA로 가서 하루를 묵은 후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 우리 여행의 일정이었다. 물론 이 계획도 다 동행인이 짰고 숙소 예약 역시 그랬다. 귀찮은 일을 모두 그에게 떠밀어놓고 그저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는 여행인데도 나는 떠나기 전부터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미국 물가가 살인적이라던데, 환율이 이렇게 높은데 여행을 가야 하는 걸까. 서울의 온갖 업무와 밀린 가정사를 안 보이는 척 더러운 빨랫감처럼 쑤셔 박아놓고, 떠나는 게 맞는 걸까.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렘보다는 후회와 걱정만 하는 나에게 ‘여행 전 사전 미팅’을 주선한 동행인이 물었다. “너, 이 여행 가기 싫은 거지?”
이 친구와는 여러 번 여행을 함께 했었다. 코로나19 직전에 운 좋게 다녀온 호주 여행도 함께였고, 그 전에 발리 여행도 함께했다. 내 휴대폰 사진첩에 몇 천 장 쌓여 있는 해외여행 사진 중 최근 5년 사진에는 모두 이 친구가 찍혀 있다. 같은 잡지 업종에서 일하기에 일반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보다는 좀 더 자율적으로 휴가 일정을 짤 수 있어, 우리는 아주 많은 곳을 함께 돌아다녔다. 무엇보다 ‘생활 패턴’과 느긋한 성격이 잘 맞았다. 한 사람은 지나치게 계획적, 한 사람은 즉흥적이라면 그 여행의 결말은 파탄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지나치게 느긋하고 즉흥적이었다. 덕분에 계획도 잘 세우지 않고, 일단 떠난 후에 그곳에서 끌리는 곳에 들어가 식사를 하고 구경을 했다. 두 사람 다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한 덕분에 외관만 봐도 그런 촉이 잘 맞는 편이었다.
늦잠을 자서 일과 중 반절이 날아가도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다시 여기 안 올 것도 아니고, 여행까지 와서 촉박하게 돌아다니지 말자.’가 우리의 여행 모토였다. 서로에게 스트레스 주지 않고, 독촉도 하지 않으며 무계획으로 돌아다니다 즉흥적으로 만난 공간에서 탄성을 지르며 ‘우와, 귀엽다. 맛있다.’를 연발했던 우리의 여행은 대개가 성공적이었다. 둘 다 어디 가서 무계획적인 걸로는 빠지지 않는데, 내가 더 무계획이었던 터라 비행기 표나 숙소 예약은 주로 이 친구가 했다. 그 부분에 있어서도 ‘내가 더 무엇을 했는데, 이건 니가 해.’라고 계산하지 않는 것이 이 친구의 미덕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관광지가 집결되어 있어 택시 타고 스폿과 스폿을 이동만 하면 되는 발리가 아니었고, 치안이 안전해 길에서 강도 만날 일이 드문 호주도 아니었다. 유튜브에서 LA만 검색해도 현지인들의 겁주는 영상이 나열되었다. 제목들이 죄다 이랬다. “미국 서부 여행 안전하게 여행하려면 이건 꼭 알아두세요!” “LA 여행 지금 꼭 와야 한다면?” 내용을 대충 살펴보면 지금 미국 서부는 마약 중독자 수와 함께 범죄율이 급상승해 길에 차를 그냥 세워두면 유리창을 깨고 블랙박스까지 털어가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선정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조회 수를 유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최근 미국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전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예전보다 위험한 상황이니 준비를 많이 하고 가라는 것. 한 블로거는 고대하던 미국 여행을 위해 1년 전부터 여행 루트를 짜고 준비를 했다는데. 이걸 어쩌나, 친구와 나는 떠나기 2주일 전 숙소 예약을 겨우 마쳤다.
“난 LA에 가고 싶어. 넌 샌프란시스코에 가고 싶다고 했지? 그럼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딜 가보고 싶어?” 친구가 계획을 좀 세우자며 물었다. ‘아, 내가 왜 샌프란시스코에 가고 싶어 했지?’ 나는 그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 주의: 여행기인데 아직 출국도 안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