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나는 궁금했다. 왜 아무도 사립학교의 교사 채용 시스템을 문제시 삼지 않을까. 사립학교에 정규직 교사로 채용되려면 돈을 내야 한다. 그리고 학교에 교장, 더 높이는 이사장의 연줄이 있어야 한다. 돈이 있어도 연줄이 없으면 학교에 정규직 교사로 채용될 수 없다. 과목 별로 내야 하는 ‘돈’은 천차만별이다. 국, 영, 수와 같은 주요 과목은 5천만원에서 7천만원. 과학이나 예체능 과목처럼 선택과목은 1억도 내야 한다(고 들은 게 5년 전 시세니 지금은 더 올랐을 지도 모른다). 직장을 잡기 위해 돈을 내야 한다? 이건 누가 봐도 불법이다. 그러나 내 주변에 교사를 준비하는 대다수의 친구들은 그게 어쩔 수 없는 관행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돈을 내고라도 정규직 교사로 채용되고 싶지만 ‘연줄’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돈을 아무리 짊어지고 학교에 로비를 해도 이사장의 인맥 없이는 접근조차 불가한 것이 ‘사립학교 교사’ 자리다. 사대 학생들도, 교수들도 학교에 취업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정설, 하지만 사립학교 교사 채용과 관련된 고발 뉴스 한 번 본 적이 없다. 아무도 고발하지 않고, 아무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그러니 기간제 교사 효주(김하늘)가 주인공이고, 이사장 딸이자 정규직 교사인 혜영(유인영)이 주인공인 <여교사>를 보러갈 때 나는 ‘교사 사회’의 불법과 계급 문제에 대해 이 영화가 얼만큼 그려냈을지 기대를 했던 것이다.
내 주변에는 기간제로 일하는 친구와 후배들이 많았다. 게다가 학교들은 갈수록 정규직 일자리를 기간제 교사 일자리로 대체하고 있다. 정규직 교사 대신 기간제 교사를 채용하고 남은 ‘돈’은 학교의 수익으로 남는다. 기간제 교사들은 ‘다음 계약’이 걸려있기 때문에 불합리한 학교, 정규직 선배 교사들의 요구에 대응할 수가 없다. 일반 기업에서 계약직이 받는 불평등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정규직 교사들은 귀찮은 서류 업무, 잡무, 담임 업무나 동아리 담당 교사 업무 등을 기간제 교사에게 돌린다. 대부분 사회 초년생인 기간제 교사들은 어쩔 수 없이 ‘덤’의 일들을 받아들인다. 학생들도 누가 정규직 교사이고 누가 기간제 교사인지 다 안다. “진짜 선생도 아닌 게, 시발”이라고 뒷 말을 하는 <여교사> 속 학생의 대사는 기간제 교사들이 진짜 자주 겪는 일이다.
<여교사>의 효주는 다음 차례는 ‘나’일거라고 기대를 품고 있다. 다음 과학 부서에 정규직 TO가 나오면 내 차례라는 기대 말이다. 무표정하게 주어진 일을 딱딱 처리하고, 어딘지 얼굴이 회색빛으로 보이는 그녀 안에 아직도 순수함이 남아 있다면 바로 이런 일말의 ‘기대감’일 것이다. 이런 기대감은 대부분 상급자들의 희망 고문 때문에 쑥쑥 자라난다. 아마도 귀찮고 잡다한 업무를 효주에게 넘기며 교무부장, 교감 선생은 자주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알지? 다음에 빈 자리 나면 효주 선생 차례인거. 내가 다 지켜보고 있어.” 학교 사회 뿐 아니라 어느 기업에서나 ‘희망 고문’만큼 계약직을 열심히 달리게 하는 채찍은 없다. 상급자가 지켜보고 있어, 이 조직은 내가 필요해, 열심히 하면 기회가 올 거야, 라고 믿는 순간 그 어떤 당근을 던져주는 것보다 계약직은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도 이사장의 귀여운 딸내미가 갑툭튀하고, 그토록 갈망하던 빈 자리를 차지한다. 온유하게 인내하며 참고 견디면 세상은 앙갚음을 한다. 게다가 혜영은 효주의 학교 후배였고, 세상에 시름 따위는 1도 모르는 해맑은 목소리로 “선배, 선배”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내자 한다. 효주 입장에서 혜영은 당연히 고까운 존재다. 같은 과목, 같은 학교, 더구나 경력은 내가 더 많은데, 내가 그토록 힘들고 어렵게 이루고자 했던 것을 저 여자애는 처음부터 다 가지고 있다. 거기다 예쁘고 애교 많고 착하기까지 한다. 얄미움을위한 3종세트를 장착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효주는 그 악의를 숨기지 않고 혜영에게 드러낸다. 얼굴에 ‘나 너 싫어’라고 쓰여 있으니 천하의 눈치 없는 혜영까지도 “저 미워하시는 거 알아요”라고 말할 지경에 이른다.
효주가 혜영을 미워할 수 밖에 없는 마일리지는 계속 쌓인다. “초임에 이사장님 따님”이니 이런 일까지 시킬 수 없다며, 혜영의 귀찮은 잡무를 선배 교사들은 효주에게 시킨다. 직장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이 장면에서 가장 크게 분노할 것이다. 내 일도 아닌 남의 일을 떠맡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효주가 혜영의 일을 대신하는 이 장면을 감독은 너무도 빨리 지나쳐 버린다. 효주의 표정은 분노의 기색하나 없이 여전히 무표정하다. 효주는 차분히 분노 마일리지를 쌓아가고, 우연히 혜영과 남고생 재하(이원근)의 정사 장면을 목격하고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부터는 다들 예상하듯이, 효주는 혜영의 어린 애인을 빼앗는 것으로 복수를 하려 한다. 그리고 그것은 효주의 예상대로 차근히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효주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된다. 재하의 마음은 여전히 혜영을 향해 있었고, 혜영의 지시로 효주와 사귀는 척을 했다는 사실을. 효주는 어느 면에서도 혜영의 우위에 설 수가 없었고, 우위에 있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파멸. 혜영의 예쁜 외모를 빼앗고 없애버리는 것 뿐. 그리고 이로 인해 혜영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효주가 그토록 간신히 지켜온 일상 마저도 파멸하고 만다.
<여교사>는 내동 김하늘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회색빛처럼 보이고, 화장기도 없고 어딘지 왼쪽과 오른쪽이 불균형해 보이는 얼굴. 지친 기색을 연기하는 김하늘의 얼굴. 우리는 부자들이 적어도 성격이 나쁘거나 가족이 분열하거나 행복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들은 성격 나쁜 부잣집 아가씨보다 가난하지만 착한 우리의 캔디를 좋아한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금수저 아가씨가 흙수저 캔디보다 예쁘고 착하고 구김살 없을 가능성이 100%다. 재하가 효주보다 혜영을 사랑하는 것도 당연하다. 업무에 지쳐서 흔한 팩 한번 얼굴에 붙일 틈 없이 잠드는 효주보다 스파 다니고, 미용실 다니며 몸매와 얼굴을 가꾸는 혜영이 훨씬 예쁠 것 아닌가. 게다가 혜영은 금전적으로 줄 수 있는 것도 많다. 만났을 때 삶의 찌든 냄새보다는 인생을 즐기면서 얻은 각종 대화거리들을 물고와 이야기 나누는 재미마저 있는 것 역시 효주보다는 혜영 쪽이다. <여교사>에서 가장 쓰라린 것은 그것이었다. 효주가 이사장 아버지를 갖지 못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제 힘으로 다 이뤄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출발선이다. 하지만 효주는 노력해도 ‘사랑하는 어린 남자애’ 마음 하나 혜영에게서 빼앗아 올 수 없다. 같이 밤을 보내고 아침밥을 차려주는 평범한 효주보다 재하에게 더 매력적인 것은 호텔에서 같이 밤을 보내고, 룸서비스를 시킬 수 있는 혜영쪽인 것이다.
감독은 ‘생존을 위해 자존감을 포기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서 <여교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을 가서 만났던 부자인데 착하기까지 한 친구들을 보고 느꼈던 자신의 열등감을 그려보고 싶었다고도 했다. 효주는 먹고 살기 위해, 교사라는 남보기에는 어엿한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웃음기 없이 살아왔다. 교무부장이나 선배 교사들의 무시도 일상으로 넘겨왔다. 그게 생존을 위해 자존감을 포기한 거라면, 파멸 후의 효주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힘들게 지켜온 일상을, 효주는 왜 그렇게 쉽게 놔버린 것일까. 기간제 교사에서 살인자로 추락해버린, 그녀를 잡으러 온 경찰차 소리를 들으며 교무실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존감을 포기하면서 간신히 지켜온 일상. 방 하나 딸린 낡은 빌라를 깨끗하고 깔끔한 가구로 채워 넣고 살아온 그녀의 삶이란 무엇인가. 하위 계급의 일상이란 지키기 위해 자존감을 버려야 하지만, 그만큼 쉽게 놓아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 과연 감독인가 효주 자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