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드라마 영화 기대작
제작이 확정된 후 개봉에 이르기까지 제작기간이 1년 남짓 걸리는 영화의 경우 2020년 개봉 예정작 리스트를 1월이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영화보다 제작기간이 더욱 타이트한 드라마는 아직 상반기 방영 예정작이 2월까지의 주요 미니시리즈 정도만 발표된 상태이지만 사실 연초가 되면 올해의 기대작 리스트 정도는 톺아볼 수 있다. 간략한 시놉, 감독과 작가와 같은 주요 제작진의 이름, 주인공 배우 캐스팅 정도만 공개되어도 우리 머릿속에는 대략의 시청 기대지수가 짜여지기 마련이다. 2018년 JTBC와 tvN의 압승으로 '지상파의 시대는 저물고 케이블과 종편의 시대'라는 종언이 내려졌다면, 2019년은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점령으로 ‘TV의 시대가 끝났다’는 위기 선고가 내려졌다. 그렇다면 디즈니플러스를 비롯한 대형 미디어의 OTT의 한국 진출이 예고된 2020년, 한국의 제작자들은 어떤 영화와 드라마로 이 거대 공룡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을까.
2020년의 개봉 예정작 중 제작비 예산이 큰 영화들은 언제나 봐오던 익숙한 구도다. 남자 주인공+남자주인공들이 재난이나 위험한 사건에 휘말려 탈출을 해야 하거나, 배후 세력에 맞서 싸운다. 류승완, 강제규, 우민호, 양우석, 이용주 등 높은 타율로 성공작을 내놨던 유명 감독들이 신작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들 모두 이병헌, 정우성, 하정우, 공유, 박보검 등의 남자 배우들과 함께 돌아온다. 배우와 감독의 이름, 그리고 신선한 소재로 기대지수를 꼽는다면 역시 <서복>(이용주 감독)이 눈에 띈다.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룬 <서복>에서 공유는 전직 정보국 요원 역할을 맡았고 박보검은 복제인간 '서복'을 연기한다. 강제규, 류승완, 윤제균 감독은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들고 돌아온다. 류승완 감독의 <탈출: 모가디슈>(가제)는 1990년 소말리아 내전 속에서 고립된 남북대사관 공관원들의 탈출 사건을 모티프로 했고 김윤석, 조인성, 허준호가 출연한다. 강제규 감독 5년만의 복귀작 <1947, 보스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열린 보스턴 국제마라톤대회를 배경으로 했고 하정우, 임시완이 출연한다. 하정우는 손기정 선수를, 임시완은 대회 우승자인 서윤복을, 배성우는 남승룡 선수 역을 맡았다. 윤제균 감독의 <영웅>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준비하고 실행한 후 연행된 이후까지 과정을 그린다.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화 했으며 뮤지컬에서 안중근 의사를 연기했던 정성화를 캐스팅했다. 사실 2019년에는 실화에서 모티프를 따왔던 영화들의 흥행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해외 로케이션까지 진행해 큰 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들의 결과물이 궁금한 이유다.
청부살인을 의뢰받고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는 남자의 이야기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홍원찬 감독)에는 황정민, 이정재, 박정민이 출연하고 <불한당> 변성현 감독의 <킹메이커>에는 설경구, 이선균, 유재명, 조우진이 출연한다. CJ ENM, 롯데와 같은 배급사에서 발표한 상반기 리스트에서는 이처럼 남자 배우들이 주가 된 범죄액션 대작들이 눈에 띈다. 2019년 <걸캅스> <항거: 유관순 이야기> <82년생 김지영>등의 영화들이 제작비 대비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2020년 개봉작 리스트에서 아쉽게도 여자 주인공들이 주축이 된 영화의 개수는 현저히 적다. 고아성, 이솜, 박해수 등 20대 여배우들이 주축이 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종필 감독), 박신혜, 전종서, 김성령 주연의 <콜>(이충현 감독), 라미란, 나문희 주연의 <정직한 후보>(장유정 감독), 김혜수, 이정은, 김선영 주연의 <내가 죽던날>(박지완 감독) 정도가 다다. 물론 개봉일을 잡기 전 각 배급사들이 주력하는 제작비가 큰 영화들의 이름만 공개됐기 때문에 이 외에도 여성 주연의 다른 영화들이 제작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몇 개의 영화를 보탠다 해도 2020년에도 한국 상업영화에서 여성감독, 여성배우들에게 주어지는 자리는 여전히 비좁기만 하다.
드라마는 어떨까. 2019년 최고 흥행작 두 편 Jtbc <스카이 캐슬>과 KBS2 <동백꽃 필무렵>의 공통점은 넷플릭스가 투자 및 방영을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드라마 모두 여성 캐릭터를 세심히 구축시켰으며 그들간의 비밀을 파헤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확장시켰다. 그런 드라마가 있었는지조차 기억 안 나는 <킬 잇> <동네변호사 조들호2> <트랩> <위대한 쇼> <아이템> <저스티스> 등의 드라마들이 톱스타의 복귀작으로 홍보를 진행하고, 거시적인 사건을 남자 주인공이 파헤치는 설정으로 처참히 실패했다는 것을 볼 때, 더 이상 시청자들은 드라마에서 머리 복잡하고 생활과 동떨어진 범죄 및 정치물을 보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일단 2020년에는 김은숙, 박혜련, 김은희, 이수연 작가의 신작이 방영 예정이다. 김은숙 작가의 <더 킹: 영원한 군주>는 대한제국 황제와 대한민국 형사의 공조를 그린 로맨스인데, 평행세계 속 다른 시대에 사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작가와 <상속자들>을 함께 했던 이민호, <도깨비>를 함께 했던 김고은이 출연한다. 박혜련 작가의 <샌드박스>에는 남주혁, 수지가 출연하고 수지는 스티브잡스를 꿈꾸는 스타트업 대표를, 남주혁은 그녀의 첫사랑 역을 맡았다. 이수연 작가의 <비밀의 숲>, 김은희 작가의 <킹덤>도 시즌2로 돌아오고 <비밀의 숲>은 주연진이 동일하게 출연해 첫 리딩을 마쳤다. 늘 그랬듯이 웹툰 원작(<이태원 클라쓰>, <루갈>), 로맨스소설 원작(<날씨가 좋으면 찾아아겠어요>)의 드라마들도 상반기 방영 예정이다. 그 외에 정해인이 출연을 확정지은 tvN<반의 반>, 서현진 대신 이성경이 출연하는 <낭만닥터 김사부> 시즌2, 고수, 이성민, 심은경이 출연하며 대한민국에 제2의 IMF가 온다는 설정의 tvN <머니게임>, 김희애 주연의 <부부의 세계> 등도 방영 예정이다.
여기까지만 봤을 때에는 2019년에도 그랬듯이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가 준비되고 있는 것 같지만 지금은 배우도, 작가도, 시놉시스도 이제는 작품의 성공을 담보하지 못하는 시대다. 김영현, 박상연 작가에 <미생> 김원석 감독, 송중기, 장동건이 출연한 500억 대작임에도 최고시청률이 7%에 머물렀던 tvN <아스달 연대기>, 1.7%에서 시작해 최고 시청률 24%를 기록했던 <스카이 캐슬>의 역전을 상기할 때 드라마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의 이름도, 채널의 파급력도, 마케팅도 아니다. 대중은 '재미'있는 것을 알아보고 선택하게 되어 있다. 영화나 드라마는 종국에는 이야기다. 얼마나 극을 짜임새있게 구성하고, 마지막까지 보는 사람을 흡입력있게 붙들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과거의 성공작과 실패작을 가름해보는 것은 제작진이 미리 풀어볼 수 있게 주어지는 예습지다. '이 장르가 잘 됐으니 그대로 따라하자'가 아니라 시청자가 무엇에 왜 열광했으며, 어디서 새로움을 느꼈는지를 해석하는 눈이 신작의 성공을 가름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2020년 예정작들의 리스트만 살펴봤을 때에는 제작진들이 그 예습지를 잘 풀어낸 것 같지는 않다.
나일론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