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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 비행기 Oct 04. 2023

비행 소녀를 만나 결혼을 하다

제12화. 승무원과 결혼한 항공사 사내 커플 이야기

오늘도 단정한 루틴을 위해 회사 헬스장에서 새벽 운동을 한다. 러닝머신에서 넷플릭스로 Space X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의 누군가는 우주로 향해 나아가는 원대한 꿈을 키워 나가고 있다.


불현듯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블라인드에 올라오는 회사의 가십이나 월급 몇십만 원 인상이 문제가 아닌데 말이다. 나의 노동의 목적과, 지금의 희로애락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러고 보니 나도 나의 우주가 있었다. 사랑하는 그녀와의 만남, 그리고 우리 사랑의 빅뱅으로 탄생한 나의 또 다른 우주. 우리 집 어린이까지. 교양 수업 같은 그간의 글 색깔은 잠시 접고, 지금 배우자와의 만남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회상해 본다.


1. 첫 만남 : 같은 시간의 선 위를 함께 걷다

우리는 같은 회사에 다닌다. 그때는 직원들 간의 관계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친절했고, 다정했으며, 생기가 넘쳤다. 우연히 연락처를 알게 되고, 우연히 어떤 부탁을 들어준다. 두 가지 우연이 만나, 하나의 인연이 만들어졌다. 이성 간에 어떤 도움을 주고받을 때, 연애의 불꽃이 가장 잘 일어난다.


처음에는 회사 이야기에서, 이내 두 사람의 내면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는 서로의 삶을 관통하고, 그 관통한 틈 사이에서 사랑의 마음이 싹튼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공통된 시간의 선이 만들어지고, 그 시간의 선 위를 함께 걸어 나가자고 약속한다. 어느덧 나는 그녀의 주위를 공전(公轉)하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 함께 데이트하기


2. 연애 중 : 비자발적인 비밀연애

공항에서 운송업무를 담당하는 총괄 매니저이고, 그녀는 항공편의 기내 안전과 서비스를 책임지는 캐빈 매니저이다. 보이스톡이 아니어도 워키토키를 통해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지막 손님이 탑승하고, 캐빈 매니저와 탑승이 완료되었다는 표식으로 서로 엄지 손가락을 치켜든다. 그리고 항공기 도어를 닫기 전, 준비해 둔 초콜릿을 기내로 넣어 준다. 항공기 문을 닫는 것은 통상적인 나의 업무는 아니지만, 그녀가 근무일 때는 종종 이렇게 서프라이즈를 해준다. 그리고 야간 비행을 끝내고 공항에 도착하면, 종종 마중을 나가서 집까지 데려다준다.


우리 둘은 모두 스케줄 근무를 수행하는 직군에 속해있다. 그렇다 보니 굳이 비밀로 하지 않아도 우리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비밀 연애가 되어 버렸다. 배우자 친구들의 남자 친구가 삭제되거나, 바뀌어 가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사랑은 변함없이 이어진다. 우리의 연애는 정주행 중이다.


커플 사진


3. 결혼할 결심 : We're on cloud nine

그때의 우리 회사는 나날이 성장해 갔고, 우리의 사랑도 그만큼 깊어진다. 아홉 번째 구름 위에 있는 우리다. 길들여짐에 대해 말하는 어린왕자의 이야기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순간 자체가 행복한 호르몬을 발산해 준다.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 거리에 흘리고 있는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


회사가 확장하는 만큼 나의 업무도 바빠진다. 숨 가쁜 업무의 연속은 권태기를 느낄 틈조차 뺏아간다. 일과 사랑, 그것들을 지탱하는 시간의 촘촘함은 느슨해질 수도 있는 우리 사랑의 틈새를 단단히 연결시켜 주는 아교 역할을 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연애만 할 수는 없다.


* be on cloud nine : 아주 행복하다 (to be very happy about something)
결혼식 청첩장 시안


4. 결혼 : 어쩌다 보니 회사의 협찬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호주에 있는 배우자의 절친 H는 손재주가 좋다. 우리를 위해 손수 청첩장의 배경을 그려 주었다. 나는 그곳에 활자를 입혀 우리만의 청첩장을 만든다. 호주 이모가 된 그녀는 지난봄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어린이와 우리는 햇살 좋은 야외 결혼식을 만끽했다.


"널 사랑하겠어."

배우자의 동기이자 동생인 J가 축가를 불러 준다. 사전에 상의도 없이 마지막 소절에 마이크를 나에게 가져다 댔지만, 당황하지 않고 축가의 마침표를 잘 찍었다. 지난여름에 우리 가족은 J의 첫째 돌잔치에 참석했다. 장거리 손님상을 받은 나의 배우자는 고교 춤 동아리 출신답게 멋진 웨이브까지 한껏 뽐냈다.


배우자는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그녀가 속한 사내 연주 동아리의 축주는 결혼식에 사랑의 기운을 한층 더 끌어올려준다. 나는 클래식보다는 외국어 회화 음원이 더 친숙하다. 이런 배우자의 말랑함은 사막 속에 우뚝 서 있는 선인장 같은 나에게 촉촉한 단비를 흩뿌려 준다.


어쩌다 보니 하객까지 직장동료들이 많이 참석해 주었다. 돌이켜 보니 우리 결혼식의 많은 부분들이 회사의 협찬으로 이루어진 듯 보였다.

결혼식 축하 연주


5. 신혼여행 : Kiss me before you fly

결혼을 하면 회사에서 5일간의 경조휴가를 제공한다. 나는 거기에 더해 5일의 휴무를 더 신청했다. 주말까지 합하면 총 14일, 2주가 된다. 당시의 팀장님은 연유는 모르겠지만, 나중에도 휴가는 길게 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은 그 누구도 약속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지금 7년이 지났지만, 그렇게 길게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그리고 제일 선배인 내가 이렇게 가야지, 후배들도 부담을 덜 가지고 신혼여행을 갈 수 있지 않을까. 옆 부서의 P 대리는 팀장님 눈치가 보여서 일주일간의 결혼 휴가를 다녀왔다고 한다.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

신혼여행은 유럽으로, 현지의 숨결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일정에 "빡빡함"을 많이 가미했다. 그리고 혹시나 여행 중 고단함으로 발생할 수 있는 감정 쓰레기들을 배출할 수 있도록 스위스에서의 "널널함"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위스 융프라우 - 하이킹 중 (2016년 9월)


6. 결혼 이후 : 시간은 사랑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사내 유튜브 채널의 콘텐츠 중 하나로 회사 커플들의 짤막한 인터뷰 영상이 주기적으로 업로드되고 있다. 나름 우리 회사에서는 유일무이한 공항과 캐빈 커플이라, 내심 촬영 섭외가 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 우리가 너무 ‘고인 물’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지난봄 담당자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왔다. 내성적인 나의 MBTI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예전 같으면 살짝 멈칫하고 고민했을 텐데, 빼지 않고 흔쾌히 촬영을 마쳤다.


우리가 결혼한 지 7년 하고도 한 달이 지났다.

오랜만에 추석 연휴를 함께 보내고 있는 나의 배우자가 한마디 건넨다.


"결혼 10주년이 되면 우리 리마인드 웨딩 촬영 할까?"

배우자는 나에게 결혼 생활의 순탄함을 유지하기 예상 문제지를 던져 줬다.

이제 나는 그 문제를 잘 풀기만 하면 된다. 정답을 잘 맞혔는지, 3년 뒤 이곳에 후기를 남겨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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