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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고 Nov 15. 2023

번아웃에서 퇴사하기까지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1. 번아웃


코로나가 한번 휩쓸고 지나간 2021년 가을. 두 살 반인 아이를 데이케어에 보내는 것은 겁이 났던 터라 내니에게 맡기며 맞벌이를 했다. 코로나 이전에는 공정 엔지니어들이 항상 팹에서 일을 해야 했으므로 출근해서 미팅하고 팹에 다녀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코로나 이후 거리 두기를 실시하면서 테크니션이 오퍼레이션을 대신해 주는 시스템이 생겼다. 회사로서는 하루 평균 8시간을 일하는 비싼 엔지니어를 고용하는 대신에 8시간씩 3교대로 일하는 저렴한 테크니션을 고용하여 24시간 팹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고, 실험을 직접 하지 않게 된 엔지니어들에게 더 많은 프로젝트를 할당해 줌으로써 고용 효율이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반면 엔지니어에게는 과도하게 업무가 밀렸다(고 모두들 느꼈다). 예를 들어, 기존에는 혼자 샘플을 준비해서 팹에서 실험을 하고 나오는 데에 1시간이 걸리고 데이터 분석에 1시간이 걸려 총 2시간을 일하는 상황이었다면, 테크니션 도입 이후에는 30분 정도 일을 위임하는 데에 쓰게 되어 실험 시간은 줄었지만, 대신 프로젝트를 2개를 맡게 되었으니 실험에 쓰는 시간 1시간에 분석하는 데에 2시간, 총 3시간을 일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직접 실험을 하는 대신에 누군가에게 실험을 맡기면서 생기는 비효율성도 분명 존재했다. 테크니션의 실수나 커뮤니케이션 미스로 실험을 재진행해야 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실제 실험 중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에는 결과 분석의 신뢰도가 떨어지기도 했다. 또 24시간 팹 운영이 되다 보니 팀마다 운용하는 시간을 로테이션하는데 밤 시간에 일을 하는 테크니션에게 실험을 맡겨야 하는 경우에는 엔지니어 또한 밤 시간에 리모트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잦았다. 이와 더불어 재택근무의 함정을 해본 사람은 모두가 경험했듯이, 출퇴근 시간을 아끼는 반면, 온라인 미팅시간이 빽빽하게 잡히고 특히 점심시간도 미팅을 잡는 데다 퇴근 시간도 애매하니, 쉴 틈 없이 일하게 된다는 것. 그렇게 하루 10시간씩 일하고 주말에도 이틀 중 하루는 일하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쳇바퀴 구르는 듯한 삶을 살며 번아웃이 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장기적인 커리어 방향을 고민해 보았을 때에 반도체 쪽으로 계속 이어나갈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일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고민하게 되는데, 기술의 혁신 자체는 놀랍고 흥미로운 구석들이 많아 배울 것이 많았지만 반도체 산업 발전에 내 인생을 투자한다고 생각하니 큰 감흥이 없었다. 


#2. 퇴사


그럼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기여를 하고 싶은 지를 생각해 보니 학생 때부터 순수하게 좋아했고 하고 싶었던 건 ‘환경’ 분야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요즘은 기후 환경, 저탄소, 탄소중립, 지속가능 등의 팬시한 이름들이 붙어서 그런 지 더 신나고 설레었다. 커리어 방향성에 대한 확신이 들자 퇴사에 대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한 시라도 빨리 새로운 커리어 트랙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좋겠다는 조급한 마음에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이 인생을 낭비하는 것만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맞벌이를 하며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남편의 소득이 있으니 페이첵에 대한 걱정이 덜 하기도 했다. 그렇게 입사 5년 만에 퇴사하기로 마음먹고 결정을 고수했다. 2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지만 지난 일을 어쩌겠는가. 괜찮다. 아직 나는 잘 살고 있다.


아쉬운 점 1. Employed 상태가 주는 안정감


사람들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직접 경험해 보니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페이첵이 주는 안정감이 사라지는데, 남편이 버니까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 가정 경제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내 마음이 아주아주 불편했다. 사지가 멀쩡한 30대 젊은이인 내가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분명 집안일도 하고 아이도 케어하며 바쁜 하루를 보냈는데 당장 벌어들인 수입이 없으니 시간을 흘려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지인들이나 친구들을 만날 때에도 괜히 스스로 위축됐다. 회사에서 잘린 것도 아니고 내 발로 당당히 나왔는데.. (보스의 보스의 보스, 그 위의 보스, 또 그 윗분까지 나의 결정을 만류하며 승진 시켜주겠다고 붙잡았었는데!) unemployed 상태의 내가 무능력하게 보이는 것 같아 자격지심이 들 때도 있었다.


퇴사 후 현실적으로 페이첵이 아쉽게 느껴진 적도 있다. 퇴사 후 예상보다 빨리 임신과 유산, 또 한 번의 임신과 출산을 했는데 이렇게 빨리 둘째를 낳을 거였으면 좀 더 참고 회사를 다니면서 출산 휴가의 혜택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만약’을 가정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단상일 뿐이다. 번아웃 상태로 회사를 계속 다녔다면 둘째 출산이 더 늦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출산 후 5개월 뒤 구직활동을 다시 시작했고 현재 진행 중이다. 인터뷰 시에는 항상 career gap에 대한 질문이 따라왔다. 나는 사실대로 커리어를 바꾸기 위해 회사를 나왔고 그 뒤로는 상황이 변해서 가족을 케어하는 데에 시간을 썼다고 이야기하지만 어떨 때엔 상대가 ‘정말?’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한다. 커리어 분야를 바꾸기 위해 회사를 관두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시간을 쪼개어 풀타임을 하는 와중에 이직하거나 분야를 바꾸는 경우가 더 많기에 자칫 순진하고 단순한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 종종 회사를 나오지 않고 커리어 전환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나로서는 그건 불가능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 일에 육아까지 감당하면서 커리어 분야를 바꾸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고 불만과 아쉬움을 참고 계속 회사 생활을 했을 테니.. 결국 더 늦게 방황을 시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쉬운 점 2. 더 여유를 갖고 퇴사했더라면


가을 무렵에 퇴사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나올 회사, 3개월 정도 여유롭게 다니면서 커리어 패스를 모색했어도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분야만 결정했지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해야겠다고 정해진 것이 너무 없었기에, 막상 퇴사한 뒤에는 ‘아, 이런 걸 해보는 건 어떨까? 음, 저것도 괜찮겠는데~’ 하며 확신 없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시간을 겪었다. 물론 그런 고민의 시간도 나름의 의미가 없진 않았지만, 미리 고민을 좀 더 하고 퇴사할 때에는 더 확고한 마음과 플랜을 가지고 나왔더라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와서 특히 아쉬운 점은, 그렇게 미리 고민을 했더라면 분명 회사 안에서 환경과 관련한 부서로 부서이동을 하는 옵션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다. 기존 경력과 다른 분야로 이직하려고 하니 이력서를 내서 인터뷰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도 어렵고, 경력은 있는데 관련 분야 경력은 아니어서 인터뷰를 하면서 하이어링 매니저의 기대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만약 부서이동으로 커리어 분야를 피벗 할 수 있었다면 그다음에 좀 더 수월하게 이직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좋았던 점 1.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퇴사 후 자유의 몸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어서 다행이었다. 퇴사 후 6개월이 지났을 때, 원치 않았던 그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당시 희귀 암 말기로 진단받고 투병을 하시던 아버지에게 현존하는 치료제들은 모두 내성이 생겨 더 이상 쓸 수 있는 약이 없다고 시한부 판정이 내려진 것이다. 딱 한 달이었다. 귀국해서 아버지와 함께 지낼 수 있었던 시간이. 만약 계속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면, 이마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기숙사 생활을 시작해 집을 떠나 생활했고 결국 이민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늘 사업하느라 바쁘셨던 아버지와 사실 추억이 많지 않다. 마지막 한 달 동안 별 것 아니지만 같이 먹고 자고 생활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특별하지 않았어도 그 시간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추억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큰 아이는 출산 후 백일 즈음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귀했는데 둘째 아이는 일 년 넘게 집에서 돌보고 있다. 육아는 물론 너무너무 힘들지만 큰 아이를 잠깐씩 보며 키웠던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아이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들을 알아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다. 사실 그래서 구직을 열심히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막상 일을 시작하면 아이와 떨어지는 것이 참 아쉬울 것 같다. 커리어를 이어가면서도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을 희생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좋았던 점 2.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좋은 습관을 만들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주어졌다. 아침이면 5km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그날그날의 고민거리나 앞으로의 커리어 방향성, 내가 가진 두려움에 대해서 성찰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관심 분야의 책도 꾸준히 읽는다.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사색하는 시간이 습관이 되니, 바쁜 일정이 있는 날에도 아침 일찍 운동으로 시작하며 하루를 차분히 시작하게 된다. 앞으로 새 커리어를 시작하더라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좋은 습관이 생겨서 뿌듯하다. 번아웃으로 쳇바퀴 도는 회사 생활 중에는 쉽사리 이루지 못했을 성과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는 느낌은 그 자체로 자신감을 준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오늘은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을지 두근거리는 날들이 많아졌다. 다시 풀타임을 시작하면 이런 몸과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런 성공의 경험은 분명 앞으로의 커리어에서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쓰다 보니 처음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다. 다음 글에서는 커리어 분야를 바꿔서 실제로 구직하는 시기 동안 느꼈던 것들에 대해 더 나누어 볼 예정이다. 커리어의 방향성을 잡는 것 또한 할 얘기가 많은데 이것도 다른 글에서 따로 이야기해 볼 것이다.



Photo credit: by Xavier Mouton Photographi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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