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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율 Nov 17. 2023

거미는 무서워~, 무서운 건 엄마 ~

나는 왜 너에게 오늘도 그토록 모질었을까



아이는 최근 “랩”이란 걸 배웠다.

랩이라고 해봤자 ”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

수준이지만 아이는 신나서 노래를 만든다

“거미는 무서워, 무서운 건 엄마~”

아이의 마음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엄마 너무 무서워

아이는 혼이 나면, 흐느끼며 엄마가 무섭다고 했다.






내 말은 어느새 칼날이 되어 아이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비수가 되어버린 나의 말과 아이의 두려움이 공중에서 맞붙고 있었다. 아이 나이 고작 만 6살이었다. 내가 지금 쥐 잡듯 잡고 있는 우리 딸의 나이. 빨래를 털듯 내 딸은 내 앞에서 탈탈 털리고 있었다.


아..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세상에서 최고의 엄마는 되지 못하더라도 잘 들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영화 “빌리 엘리엇”에서 아이의 편지를 뜯어보지 않았던 부모처럼, 아이의 삶과 인생을 존중하는 엄마이고 싶었다.


공부보다는 여행과 경험이 중요하다고 믿었고, 다양한 활동과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아이가 만 4세가 넘도록 다른 이에게 무례했던 한 번을 빼놓고는 큰소리를 내본 적도 없었다. 그만큼 귀했고, 소중했고, 말잘 듣는 예쁜 딸아이였다.



시간이 날 때면 무엇이든 함께 해주고 싶었던 그때




그랬던 첫째가 둘째가 태어나면서부터 삐딱해졌다. 혼자서 수시로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곤 했었다. 사랑이 더 필요하다기에, 둘째는 엄마에게 맡겨놓고 주로 첫째와 시간을 보냈다. 둘째는 그래서인지 슬프게도 엄마인 나와 아주 잘 떨어진다. 첫째와 여행도 하고, 못했던 학원 라이딩도 해주고, 함께하는 시간이 늘며 아이는 밝아졌지만, 여전히 자주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는 엄마를 너무도 잘 알아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아”를 되뇌었다.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와서일까. 어릴 적 아이를 돌보지 못했던 시간들이 나를 자꾸만 원초적 죄인으로 만들었다.


엄마인 나는 지쳐가고 무너져갔다.






휴직 전 가장 마음 아팠던 건 아이와 함께하지 못하는 시간이었다.

아이의 두 번째 생일에도 야근이었다. 헐레벌떡 집에 돌아간 시간은 9시가 넘었고, 우리는 그제서야 케이크 하나를 앞에 두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예쁜 풍선도 특별한 케이크도 없었다. 큰 행사를 마친 날이라 피곤했지만 최선을 다해 케이크 앞에서 웃어 보였다.


하다못해 일주일이 넘는 해외출장도 내 몫이었다. 낮에는 그곳의 일을 하고, 밤에는 한국과의 전화 통화를 위해 핸드폰을 부여잡고 잠들면서도, 수시로 한국에서 보내주는 아이의 사진을 확인하곤 했었다.




바쁜 와중에도 아이와의 주말 여행을 가기 위해 애썼던 그 시절




그랬던 아이에게 나는 이제 화를 내고 있었다. 화가 먼저인 건지, 형태 없는 화살로 날아가고 있는 내 모진 말들이 먼저인지건지 모르겠다. 화를 내고 나면 스스로 반성하고 아이에게 사과를 했다. 아이는 어느새 “엄마는 이렇게 화내고 또 사과할 거잖아” 라며 나를 간파하고 있었다. 아이를 붙잡고 울고 싶었다. 엄마도 너에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가장 기초적인 걸 바란다고 생각했다. 유치원에 다녀오면 자기 물건을 꺼내놓고, 우선 숙제를 하고. 다한 숙제를 챙기고. 물건을 꺼내놓는 건 커녕, 매번 자기가 어딘가 놔두고 엄마에게 와서 물건을 찾는다. 말하고 또 말하는데도, 엄마의 말은 매번 아이의 귓가에서 튕겨나간다. 마치 공기 속의 부유물처럼. 하루에 몇백 번을 반복해야 하는 건지.


만 6세인데도 밥도 떠먹여 줘야 먹고, 씻는 것도 도와줘야 하는 딸을 보면 화가 났다. 화가 나는 건 만 6세가 암묵적으로 혼자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일들에 내 시간을 쓰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언제나 시간에 쫓기며 살았던 나이기에,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나를 못 견디게 했다. 시간 약속을 어기는 것, 시간을 의미 없는데 쓰는 것.


육아란 본시 시간 소비적인 행위다. 네가 먹을 수 있어도 먹여주고, 네가 입을 수 있는데도 입혀주는 것. 아이 스스로 할 경우 많은 경우 어설프지만 할 수는 있으니까. 물론 아이가 스스로 하길 기다려줄 수 없는 성격 급한 엄마는 아이를 도와주기 위한 손이 먼저 나간다.



휴직만 하면 잘할 줄 알았다.

내 몸과 마음이 건강하면 잘할 줄 알았다.

마음이 건강하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어느새 ‘화와 반성’의 사이클 위에 올라타 무섭게 페달을 밝고 있었다. 아이에게 처음으로 무섭게 화를 냈던 날, 악몽을 잘 꾸지 않는 내가 밤새 악몽을 꾸었다. 내가 괴물이 되어버린 거 같았다.

나는 아이에게 자주 화를 냈고, 어느새 아이는 엄마가 무섭다는 말을 달고 산다.






자기반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너. 초심을 잃었어


이 글은 자기 반성문이다. 간절히 휴직하고 싶었던 그날 내 초심에 대한 반성이다.



이제 아이와 엄마 모두의 독립이 필요하다. 아이는 엄마로부터. 엄마도 아이로부터. 분명 6살이 스스로 하는 아이들도 많을 터. 아이에게 시간을 주고 기다려줘야 한다. 아이가 찡찡대던. 짜증을 내던, 화를 내던, 스스로 할 수 있게. 이제 나의 역할은 아이가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이제 다른 방식의 인내가 필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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