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보내는 축사
너는 내 20대의 첫 시작이었다.
스무살의 봄.
너를 만났던 그 날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하늘색 바탕에 흰 땡땡이 무늬 바지를 입고서,
너는 서 있었다.
빨간색 후드 집업 과티는 너도 나도,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 입고 있었는데
그건 단합을 위한 결의나 공동체 의식 때문이 아닌, 온전히 4월의 매서운 추위 때문이었음을
스무 살의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잠옷 바지를 입고 MT 일정을
소화하러 나온 스무 살짜리 신입생은 좀..유니크 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너답게 무심했다.
‘아 귀찮고 추운데, 그냥 편하게 입으면 됐지 뭐, 왜’ (라고 생각했겠지)
그 때의 우리는 사회 부적응자부류였고,
그 지점이 같았기 때문에 친해졌다.
나는 그 시작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선배들의 같지 않은 권력 남용을 듣고 있기
괴로웠고, 그래서 당(?)이 땡겼고
그래서 나는 갑분 초코파이 쇼핑을 하다가
너를 만났다.
(초코파이는 ‘정’의 상징인데 이것은 우리 관계의 복선이었을까. 오 뭐야 뭐야)
“초코파이 나도 하나만” VS “초코파이 사게? 나도 살까?”
솔직하게 말해서 13년 전의 기억이라 네 대사는 생각나지 않는다. (네가 내 첫사랑도 아니잖아)
수줍게 초코파이 뻗었던 내 손을 숨기며 난, ‘어랏? 이 당돌한 계집애는 누구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충남의 시골에서 소심한 내면의 반항만 하다가 대학생이 된 케이스였음으로
줄곧 경기권에서 살아온 너의 그 광역시 아우라에 흠칫 놀랐으나 질 수 없다. 짐짓 쿨한 척 하면서
너와의 대화를 이어나갔었더랬지.
물론 지금도 난 나란 사람에 대해 쥐뿔도 모르지만
그 때는 온 세상이,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물음표였다.
기억나는 거라곤, 필요 이상으로 샤이했던 우리 또래 남자 아이들,
그리고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심지어 한심하게 쳐다봐도 굴하지 않고)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여주던
(이름부터가 옛스러운) 복학생 선배들.
거기다 그런 기류를 먼저 간파하고 우릴 적대시하던 선배 언니들의 눈총 같은 것들.
우리는 단짝이 되었다.
시시하면서도 동시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타이포 그래피 수업을 들었고
불갈비 토스트나 스페셜 토스트로 아침을 떼웠고,
산 꼭대기에 있는 학교를 가기 위해 산 길(진짜 산 길)을 걸으며 젊음의 체력을 소비했고,
그런 뒤엔 내 자취방에 가 시체처럼 누워있으며 젊음의 체력을 비축하기도 하고,
이따금씩 연락오는 복학생 선배들의 부름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나가, 레몬 소주에 케이준 샐러드, 쏘야, 삼겹살, 김치전, 치킨 등을 축내기 바빴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긴 게, 우리 너무 젊은 스무살이었는데 왜 때문에 취한 기억이 없지. 난 너 취한 거 본 기억이 아직도 없다. 놀랍군.
원래 스무살, 대학생의 삶은 취기와 숙취가 8할이라는데 우리는 대체 뭐였을까.
그 비싼 레몬 소주를 시켜가지고는 세 잔 이상을 먹지 않았으니,
선배들이 품기에 우리는 실로 다채로운 클라스였던 것 같아. 우리도 참^^
우리는 산골에 있기에 아까운 미모였고, 그 와중에 필요 이상으로 치는 철벽의 질량이 같았고
우리는 서로를 웃기게 하는 일들에 탁월했고, 그렇게 스무살의 봄과 여름 두 계절을 함께 했다.
그 때로부터 정확히 13년이 지났다. 2007년의 여름, 그리고 2020년의 여름.
그리고 너는 내일 결혼을 한다.
(이렇게 쓰니까 약간 토이 ‘좋은 사람’ 같기도 하고, 성시경 ‘세 사람’ 같기도 하고 그렇다. 아련)
나는 30년 넘게 살면서 어떤 통계와도 좀 무관한 사람인데,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어.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top5는 누구일까?’
순위는 못 정하겠지만 분명한 건 네가 그 안에 든다는 거야.
(말로 하면 오그라든다고 네가 손사래를 칠 것을 알기에, 글로 쓴다. 나 작가잖아)
2007년 지드래곤이 스키니진에 하이탑을 신고
거짓말을 외칠 때,
2007년 산골에서 이다미도 스키니진에 흰 블라우스를 입었었잖아.
비록 네가 외친 건 ‘김피탕(김치피자탕수육)’ 이었지만.
그 때의 나는 누가 봐도 애기 같았는데(빵떡같이 하얀 동그라미였는데) 넌 꽤나 숙녀티가 났지.
세상 쓸데없는 오빠 형제를 가진 나와 반대로, 네 위로 언니가 있던 탓이었겠지만.
역시 광역시의 아우라!라고 생각했다. 그런 너의 세련미가 새로웠어. (친구지만 좀 언니같고 그랬지)
그리고 사람과의 티키타카가 이렇게도 재밌는 거구나, 알게 해준 내 인생의 최초의 사람을 꼽으라면,
그건 너야.
그 땐 몰랐지만 그 힘이 사람과 사람사이를 잇는 가장 끈끈한 연대라는 사실을 나이를 먹을 수록 느낀다.
언젠가, 20대 중반이 된 우리가 우리 집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너 ‘아, 은행 가야 되는데 귀찮다’
나 ‘악! 우리 집엔 왜 은행도 하나 없냐? 짲응’
내 센스에 네가 자지러졌었지. 훗.
그래서였을까. 내가 너한테 ‘네가 결혼하면 부케는 내가 받겠다!’고 한 게.
사실 나...기억이 안나.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언제 말했는지도(근데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런데도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너보다 내가 결혼을 늦게 할 거라는 명백한 시실에 대해서.
아무튼 각설하고!
웃음이, 소통이 갖는 힘을 일깨워준 사람이다 너는. 그러니 잘 살아라, 다미야 (갑분잘살아)
우리의 스무살은 함께여서 행복했고, 그 뒤로 각자의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내느라 여기저기 많이 치이고,
구겨졌던 20대 중반을 거쳐 다시 차곡 차곡 쌓고 넓어지다보니 어느덧 30대 중반이 됐어. (경악)
네가 너무 좋아하는 지원이를 만나서 행복한 연애를 이어나간 6년동안,
너와 나의 공백이 조금은 서운하고 개인적으로는 아쉽지만 (속마음: 서른 세살까지만 보고 안 볼 거 아니면 잘 해라!)
그런 너의 현재를 채근하기보다는 내 진심을 풀어내고 싶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고.
서운해도 나는 굴하지 않고 내 마음을 전하는 그런 류의 성숙한 사람이라고. (알아달라고 길게 쓴 글)
너는 이따금씩 (아니 자주) 내 문자를 등한시 여기고, 의미없는 이모티콘으로 최소한의 예의를 대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글을 쓴다.
이것은 축사일까. 일단락일까. 둘 다 맞고,
동시에 잘 하라는 협박이다.
하얀 내 친구, 낙지젓을 좋아하고 빨미까레를 좋아하고. 벽에 다리 올리는 걸 참~좋아하는 내 인천 다미. 연수 다미.
내가 많이 좋아하는 내 친구. 이제 유부녀가 되는 유부 다미.
언젠가 있을 내 결혼식에도(아마도...)
이다미 여사님 환갑잔치에서도 장난끼 서린 얼굴로 보자. 기미는 적게, 장난끼는 많이.
축하해 다미. 안녕. 다미.
2020년. 6월 20일. 너의 은동이. 너의 조파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