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미련스러움을 연출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by 무말랭이

다 써버린 볼펜을 이리저리 굴려 기어코 문장을 마무리했다. 잘 나와서 좋았는데. 나오지도 않는 펜을 종이에 짓이긴다. 옆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신경 쓰이다가 문득 내 머리가 이만큼이나 길렀던가 싶어 볼펜을 내려놓고 머리칼을 만지작거린다.


너는 유독 긴 머리가 잘 어울렸지. 머리카락은 길면서 묶는 것이 서툴러 자꾸만 흘러내리는 네 잔머리를 좋아했다. 보고 싶다고 간밤에 들어오지도 못할 고시원을 찾아온 것도, 몰래 좁은 방에서 시시덕 거리다가 벽이 얇아 옆방에서 조용히 하라고 짜증을 들어버린 것도 그땐 낭만이었다. 너는 가끔 나를 보고 이유 없이 웃었다. 나는 이유 없는 것이 좋아서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도 됐던 것은 아니었는데.


네 덕에 나는 다가오는 사람들이 어렵고, 먼저 다가가기도 지쳐버린 인간이 되었다. 머리는 뜨겁고 가슴은 차가운 삶을 이어간다. 내가 이렇게 얼굴을 바꾸기 쉬운 인간이었나 지긋한 두통을 느끼면서, 자꾸만 습해지는 손을 어루만지면서.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아직도 너를 잊기가 싫다. 미련스러운 성격도 아닌 주제에 잊기 싫어서 매일같이 글을 쓰고 그리고 생각한다. 이 애증이 흐려지면 나도 지워지는 것처럼 그렇게 부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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