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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명 Oct 04. 2022

완강하고 아름다운

날이 조금 춥긴 하지만, 버스를 타는 대신 걷기로 한다. 요즘 들어 소월길은 한참 더 속이 깊어졌다. 숲을 내려와 펜스를 넘어오는 공기도 색깔도, 그 장면을 지키고 서 있는 불빛들도 더 짙고 차분해진 느낌이다. 가만하다. 혹시 내가 방해가 될까, 숨을 죽이고 걷게 된다. 미리 연락을 하고 올 걸 그랬다. 오늘 조금 늦었는데요, 실례지만 있다가 11시쯤 찾아 뵈어도 될까요? 하고.


하지만 나는 그들의 연락처를 모른다. 소문에는 그 숲의 더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루트가 있고, 몇몇 사람들은 용케 체류 자격을 얻어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데 나한테는 순서가 돌아오지 않는다. 신청서를 내긴 했지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너무 많고 담당자의 일처리는 더디고 게으르다. 어쩔 수 없이 실례를 무릅쓰고 나는 하염없이 겨울 숲 주위를 걷고 또 걷는다.

한참을 걷다 보면 나무들도 그들을 붙잡고 있는 흙도 공기도 안으로 안으로 문을 닫아 걸고 나를 경계하는 느낌이 든다. 방해받기 싫다고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이십 미터쯤 거리를 두고 있어도 느낄 수 있다. 걷고 있을 때 아마도 나는 내가 가진 가장 예민한 감각들을 마음껏 개방하기 때문인 것 같다. 여름의 숲이 활기차고 방만하다면, 겨울 숲에는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아름다움과 긴장감이 있다.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누구와도 손쉽게 화해하지 않는. 저 혼자 높고 아름답고 완강한.  


설사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더라도 세상에는 여전히 타협하지 않는 아름다운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 모두가 나처럼 우리처럼 휩쓸려 다니지는 않는다는 안도감. 내가 경쟁할 수조차 없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엄연하다는 사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장 더러운 진창과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가장 정결한 나무들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들이 모두 다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함께 있지 않아서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 그것들 사이에 찾아야 할 길이 있고 시간이 있다

                                                           - 이성복 ‘산’


나이를 먹고 다시 읽으니 이성복의 시는 때로 세상 편리한 이분법처럼 보일 때가 있다. 진창이 더럽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곳이 그나마 우리에게 가장 따뜻한 장소가 될 때도 있고, 정결한 나무들이 있는 숲이 우리를 높이 끌어 올릴 때도 있지만, 막상 내가 그 나무들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씁쓸한 사실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줍잖게 한 마디 보태자면, 내가 서 있는 진창이 높고 정결한 나무들을 맑게 비추는 찰나야말로 내가 꿈꾸는 순간이 아닐까. 나는 내가 닿을 수 없는 완강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그 아름다움만으로 내가 서 있는 진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권리를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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